다문화사회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회가 근친상간을 금지한다.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 금기는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닌 문화적으로 습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안 되는지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전자의 다양성 추구를 통해 자손의 유전적 결함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유전병을 막는 것만이 아닌 근친혼 금지를 통해 가족제도를 안정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한 사회구조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유전적 다양성 추구와 사회제도 지키기의 보수적 성격이 긴장 속에서 공존하는 것. 이게 바로 근친상간 금지의 실체다.
다문화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다민족 사회는 용인하면서도 다문화 사회는 꺼려지는 것이 한국인의 대체적인 정서다. 각종 사회-경제적 요구에 의해 이민족의 유입은 허용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한국의 색깔을 입히려고만 하지 그들의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더 나아가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려 하지는 않는다. 필리핀 며느리가 김치를 잘 담근다고 칭찬하지만 필리핀의 전통음식이 무엇인지는 관심도 없다. 인도인 노동자가 한국말을 잘한다고 신기해 하지만 그들의 언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살게 해주는 대신 한국문화를 따라야 한다는 문화적 패권주의는 급격하게 유입되는 외부세력에 의해 문화적 주도권이 약화되진 않을지 하는 조바심으로부터 나온다. 결국 근친상간의 예에서와 유사하게 민족적 다양성 추구와 문화적 정체성 수호, 두 가지 키워드가 파열음을 내며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적 강요가 이민족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이 우리 사회에 융화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융화되지 못한 사람들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부유하기 마련이다. 이는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각종 사회문제를 발생시켜 사회적 비용을 상승시킨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서로 대립하는 키워드인 민족적 다양성 추구와 문화적 정체성 수호 간의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것이다.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는 유전적 다양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가족제도를 안정시켜 기존의 사회구조를 수호하는 방식으로 변화와 보수 간의 긴장관계를 해소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민족의 문화를 모두 인정하는 길이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다민족 사회의 긴장관계 또한 해결되지 않을까?
이를 위해선 문화에 대한 인식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 음식문화를 대표하는 김치가 지금의 형태를 갖춘 것은 17세기 초에 일본으로부터 고추가 전래된 이후이다. 일본은 포르투갈로부터 고추를 받아들였고 포르투갈은 고추의 원산지인 중부 아메리카로부터 가져왔다. 멕시코의 매운 음식 문화를 떠올린다면 우리가 자랑스러워 하는 김치도 결국은 다른 음식문화들과의 문화접변을 통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K-POP도 서양의 음악에 우리의 색깔이 덧입혀져 우리의 독특한 문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결국 문화적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문화적 교류를 통해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바뀌고 나면 민족적 다양성 추구는 문화적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닌 정체성의 형성과정 그 자체가 되어버리고 긴장관계는 사라진다. 영어가 세계언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과 미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과 더불어 다양한 언어들의 특성을 받아들여 영어가 가진 문화적 저변을 넓혔기 때문이다. 반면 수많은 소수민족의 언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자기 것만을 고수하여 언어적 고립을 자초한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정체성을 지키려던 노력이 오히려 그들 언어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시간이 흘러 정체성을 완전히 소멸시킨 것이다. 결국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선 다른 문화도 지켜주고 더 나아가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근친상간의 금지가 유전적 다양성 확보를 통해 사회의 번영을 도왔듯 이민족들의 다양한 문화가 한국 문화 발전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