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작문

힐링

아서왕 2012. 8. 6. 22:51

아스팔트 길이 이글거린다. 팔월의 태양은 이미 내 등짝을 벌겋게 태워놓고 있었다. 숨이 막힌다. 패달을 구르는 발은 감각을 잃은 지 오래다. 이마 위로 흐른 땀이 눈에 들어가 따갑다. 입술이 짜다. 길 옆으로 펼쳐진 푸른 바다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나는 지금 무얼 향해 가는가. ‘제주도 자전거 여행의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저 앞사람의 자전거 꽁무니만 쫓아 기계적인 발구름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여행을 계획한 건 학교 시험으로 지친 심신을 쉬게 하려 한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유유자적하며 제주의 아름다움과 새로운 경험을 통해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지에 도착해 한 친구가 제안한 제주도 한 바퀴 완주는 나의 낭만적인 계획을 완전히 뒤집어 엎었다. 완주라는 뚜렷한 목표와 결승점이 생기고 나니 친구들 사이에선 은근한 경쟁심이 생기게 됐고 여행은 경주가 됐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새로운 체험도 없었다. 이미 시험으로 힘들어진 심신을 또 다른 경쟁과 나에 대한 채찍질로 닥달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위가 파도에 부서질 때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섯 명 중 꼴지로 달리던 나는 전속력으로 나머지 자전거들을 앞질러 선두에 선 뒤, 갑작스레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다른 친구들도 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차례로 멈췄다. 모두 너무 힘겨워 보였다. “우리 지금 뭐 하는 거니? 우리가 원했던 게 이런 거였어?” 나의 말에 제주도 해안도로 182km 완주를 제안한 친구는 그래도 한번 세운 목표는 달성해야 하지 않겠냐고 맞섰다. 결국 전체 의견 또한 둘로 갈리었고 해가 저무는 탓에 일단 주변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멀리 매운탕집이 보였고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매운탕이 보글보글 끓는 사이 주인집 아저씨 내외와 대화를 나누게 됐다. 여행얘기부터 자식걱정, 학교생활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토박이 부부는 우리와 참 통하는 게 많았다. 아저씨는 공짜라며 광어회와 소주를 내왔고 우리도 챙겨온 안주거리를 풀어 밤이 늦도록 이야기 꽃을 피웠다. 우리가 밖에서 텐트 치고 야영할 계획이라고 하니 가게에 빈방이 있다며 공짜로 자고 가란다. 심지어 아침밥도 차려놓을 테니 먹고 가란다. 너무나 고맙다. 말로만 듣던 우리네 인심을 피부로 느낀 순간이었다. 그날 밤 우리 일행은 여행 중에 서로 하지 못했던 속 깊은 얘기를 나누며 쌓였던 갈등을 풀었다. 멀리 파도 소리가 평화롭다.

 

다음 날, 웬일인지 몸이 날아갈 듯 개운했다. 식탁 위에는 잘가라는 편지와 함께 아침밥이 펼쳐져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여행의 진짜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며 서로를 쳐다보며 껄껄 웃었다. 끝내 제주해안 182km를 완주하진 못했다. 하지만 항상 어떤 목표를 세우는 습관이 여정을 전혀 즐겁지 않은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원했던 것은 이미 얻었다. 그날 밤, 매운탕집 부부와 나눴던 정과 친구 사이의 속 깊은 대화가 삭막한 도시의 경쟁에 지쳐있던 나를 힐링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