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1%
‘2% 부족할 때’ 내가 고등학생일 때 잘 팔렸던 한 음료수의 광고카피이다. 또 ‘2%’는 실제로 이 음료수의 이름이기도 했다. 체육시간, 친구들과 햇빛이 내리쬐는 운동장을 헐떡이며 달리다 경기가 끝나면 우리는 으레 자판기로 달려가 음료수를 뽑아 마시곤 했다. 나는 그 특유의 향 때문에 2%를 즐겨 마셨다. 그런데 그 때 꼭 돈이 없어서 음료수를 마시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 나는 그 친구와 번갈아 가며 향긋하게 갈증을 축여주는 그 놈을 사이 좋게 ‘드링켰다’. 친구와 반을 나눠 마셨으니 우리가 먹은 것은 더 이상 2%가 아니라 1%였다. 하지만 그 친구의 시원하다며 내뱉는 탄성과 내게 고맙다며 짓는 진심 어린 눈빛을 보았을 때, 내 에너지는 2%가 아닌 100%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1%의 나눔은 나에게도 너에게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이러한 1%의 의미는 보다 원초적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체로 자기 인생의 1%를 태어나기 위해 투자한다. 산모는 자기 인생의 1%를 한 아이를 위해 투자한다. 이 투자의 다른 이름은 나눔이다. 산모와 아기는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같은 음식을 나누고, 체온을 나누며, 숨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나눈다. 결국 나는 어머니와 인생의 1%를 서로 공유한 셈이다. 그러한 나눔이 있었기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다. 1%의 나눔은 이렇듯 생명을 배태하고 새로움을 창조한다.
얼마 전 신문에서 포스코 임직원들의 월급 1% 기부운동에 대해 읽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직원들로서 그보다 못한 형편의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월급의 1%를 기부한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이미 태어나면서 진 1%의 빚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일까? 1% 대 99%의 사회라고 한다. 1%의 사람들을 위해 99%가 봉사하는 사회, 뉴욕 월가의 ‘점령하라’ 시위는 1%와 99%로 나뉜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사회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나뉘었지 나누지 않는다. 상위 1%의 사람들이 과연 그들 가진 몫의 1%라도 나누는가? 나누지 않는 사회는 나뉘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나뉜 1%는 다른 99%에 의해 점령당할 수밖에 없다.
%는 이미 나뉨을 배태하고 있다. 전체로부터 일부분을 떼어놓는 사고방식은 %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기호의 모양 또한 작대기( / ) 하나가 두 개의 동그라미(ㅇㅇ)를 나누어 놓는다. 문제는 이렇게 나뉘어진 두 동그라미가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타(他)와 아(我)의 구분은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고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하나가 되는 것은 그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야 내가 태어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랴. 그런데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나눠야 한다. 부부는 이불을 나누어 덮어 하나가 되니 나눔은 하나가 되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과도하게 나뉘어져 있다. 이제라도 더 이상 나눠지지 말고 나누자. 1%를 나누어, %보다는 1에 집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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