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전쟁에 대해 논하라

논술작문 2012. 9. 11. 18:32

도로, 공원, 가로등 등은 왜 대체로 정부가 공급하는가. 그것은 이러한 재화들이 비배제성과 비경합성을 가져 공공재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격을 갖는 다른 대표적인 것으로는 지식, 기술, 정보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정부에서 생산케 하기보다는 개인이 생산하게 하고 이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부여하는 편을 선호한다. 저작권, 특허권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창작물이나 신기술 등에 법적으로 배제성을 부여함으로써 개인의 창작과 기술개발에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이러한 배타적 권리가 시장에서 독점력으로 작용해 소비자의 선택권을 침해하고 특허기업이 독점적 부당이득을 취한다는 것이다. 피해는 결국 소비자에게 돌아온다. 또한 이러한 독점적 권한은 특허기술을 응용한 신규기술 개발의지를 위축시킬 개연성이 크다.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 각국 법정은 FRAND 규정을 인정하여 표준특허로 지정된 특허에는 무제한적인 배타적 권리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결국 특허는 동전의 양면처럼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삼성과 애플의 특허분쟁은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에 무감각했던 삼성에게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됐다. 70년대부터 일본제품을 가져다 분해해 보고 카피했던 전략은 21C가 되어서도 똑같이 반복됐다. 외양부터 UI, 심지어 박스포장과 광고에 이르기까지 무분별한 복제는 애플의 창조적 기술개발 동기를 약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재판에서 애플이 주장하는 직사각형에 네 모서리가 둥근이라는 디자인특허 구성요소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이미 업계 표준으로 여겨지는 디자인적 요소를 독점하고 타사 제품에 적대적 판매금지를 신청하는 것은 FRAND 원칙을 무시한 권력남용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소비자들이 겪게 될 선택권 제한이나 제품가격 상승 등의 경제적 피해가 우려된다.

 

이제 특허의 취지를 먼저 생각해 볼 때다. 새로운 기술개발과 발명의 촉진을 위해 만들어진 특허가 오히려 독점의 방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현재 진행 중인 애플과 삼성의 분쟁도 독점적 권리를 통해 상대방을 방해하기 위함이다. 서로 기술개발을 촉진하는 방향이 아닌 마치 달리는 마차에 납덩이를 다는 꼴이다. 결국 더 비싼 값을 지불하고 느려진 마차에 탑승하는 이는 소비자들이다. 특허의 권리를 갖는 대신 그 권리 행사에 있어서는 신의성실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만약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FRAND 규정과 같은 법적인 제한이 광범위하게 인정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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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논술작문 2012. 9. 4. 22:05

연애 초기 난 여자친구에게서 재미있는, 그러나 웃지 못할 얘기 하나를 들었다. 한창 잘 나가던 고교시절 자기를 놓고 주먹다짐을 벌인 두 남고생의 이야기였다. 방과 후 운동장에서 벌어진 결투. 둘은 얼굴이 찢어져 피가 나도록 싸웠는데 결국 이를 목격한 선생님에 의해 싸움은 무위로 끝나게 됐다. 마치 순록들이 암컷 하나를 놓고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듯 그들의 싸움은 자못 진지하고 엄숙했으리라. 그런데 재밌는 건 내 여자친구는 그들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중 한 명은 이웃학교 학생이었단다. 정작 구애에서 가장 중요한 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뤄진 그들의 혈투는 상처만 남긴 채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문제는 사건이 일어난 후 여자친구는 여러 헛소문에 시달려 한 동안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당사자의 입장을 무시한 싸움은 어떤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고 끝난다. 물론 일부러 과장한 얘기일 순 있겠지만 이는 현재 진행 중인 독도 영유권 문제와 닮았다.

 

무엇보다 현재의 독도문제는 다분히 인간중심적인 사고로 점철돼 있다. 무언가 지배하고 소유할 수 있는 권리는 기독교의 사상으로 정당화됐고 이후 서양을 중심으로 주인 없는 것이 없어졌다. 주인 없는 개, 고양이들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인간이 소유하며 보살펴줘야 한다는 온정적 시각마저 이를 보여준다. 결국 근래의 독도문제는 지금껏 무인도로 버려져 있던 섬의 주인을 정하는 대결이다. 모든 것에는 주인이 있어야 한다는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틀 안에서 싸움은 시작됐다. 하지만 정작 섬의 입장에 대해서, 섬에 살고 있는 동식물들의 입장에 대한 고려가 있었는지는 의문스럽다.

 

인간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중심주의는 기본적으로 강하고 우월한 자가 약하고 열등한 존재를 지배하고 소유할 수 있다는 사고로부터 파생된다.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열등한 존재로 보아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들을 침탈하고, 죽이고, 노예로 만들었다. 독일의 나치즘도 결국 우월한 게르만족이 열등한 다른 민족들을 복속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세계를 살육의 장으로 만들었다. 현대에 와서 반성되고 있는 이 침탈의 역사들은 1900년대 초 일본 어부들의 남획에 의해 멸종된 독도의 강치들과 겹쳐진다. 몇백만년 동안 인간이 살지 않은 독도에 주인이 있다면 그것은 바닷새와 강치 같은 섬의 동식물이었을진데 땅을 뺏는 것으로 모자라 아예 멸종시켜버린다니 강치 입장에선 기가 차고 눈물이 날 노릇이다.

 

이처럼 어떤 땅을 점령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소유의 정당한 권리라는 것이 어떻게 성립되는지도 모호하지만 그 권리에 집착해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것들의 입장을 잊어선 안 된다. 독도와 주변해역의 자원개발 가능성 때문에 격화되는 싸움이다. 인간들의 이권다툼에 희생될 독도의 동식물들을 생각하자. 수천마리의 괭이갈매기, 바다제비, 물 속 오징어들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마지막 한 마리까지 죽임 당한 강치들을 생각한다면, 인간들의 영유권 다툼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고려가 없다면 일본이 우리나라에 행했던 침탈의 답습에 불과하다. 독도의 진짜 주인은 무시된 채로 지금처럼 양보 없는 싸움만 계속된다면 결국 모두에게 상처만 남길 것이다. 피 터지게 싸워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사랑하는 여자에게 상처만 준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남자가 떠오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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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해결방안

논술작문 2012. 9. 1. 22:42

위안부라는 단어는 영어로 ‘comfort women’으로 번역되며 군인들을 위안하는 여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사용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피해자들이 마치 매춘부처럼 자발적으로 지원한, 성적으로 타락한 여성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에 지난 7,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위안부를 성 노예(sex slaves)’로 고쳐 불렀다. 이 발언에 일본 외상은 즉각 반발했고 최근에는 이 문제가 독도문제와 엮이면서 일본의 우경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노다 일본 총리는 1993년 위안부 강제동원을 일부 인정한 고노담화를 수정하자는 제안을 했고 일본 우익인사들은 강제동원 증거를 내놓으라며 반발하고 있다.

 

일제에 의해 유린당한 위안부 피해자들을 매춘부로 비하하는 그들의 논리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강제동원에 대한 증거는 필수적이다. 실제로 그 증거는 많은데 전쟁 당시 미국 의회조사국 보고서 내용이나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의 미국정부 보고기록, 네덜란드 정부문서기록 보관소 자료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이를 차치하고라도 한국, 중국, 동남아 등지의 피해자들의 일관된 증언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명확하고 반박 불가능한 증거들을 통해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은 위안부 문제 해결의 초석이다.

 

하지만 이런 많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반발하는 것은 우리가 이 문제를 민족대결의 프레임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물론 한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민족 전체에 대한 일제의 성 침탈로 규정지은 것은 사회 전체가 이 문제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발전된 민족대결 구도는 오히려 일본 우익세력에 힘을 실어주고 그들이 자학사관을 탈피해 재무장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차라리 피해자 개개인의 고통스러웠던 경험과 삶을 조명하는 편이 민족과 국적을 초월한 인류의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피해자들의 비참한 경험과 아픔을 대면한다면 일본인들 어찌 이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위안부 문제는 민족대결이 아닌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한 인류애적 공감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일본은 민간차원에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라는 조직을 설립하여 위안부 피해자를 보상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단순 경제적 보상에 불과하며 역사적 승복과 사죄로는 볼 수 없다. 참혹하게 짓밟힌 인생이 자본의 논리로 보상될 수 있다는 편리한 발상은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민족대립의 도식 속에 회수됐던 피해자 개개인의 참혹한 삶을 상기한다면 이런 경솔한 행동은 없었으리라. 진정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는 길은 일본 스스로가 진실을 밝히고 기억하는 것이 먼저다. 경제적 배상은 그 후의 일이다. 민족과 국적을 떠나 한 인간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직시하고 잘못을 인정하며,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길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다. 진정으로 위안이 필요한 이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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