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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중임제 개헌
“대통령 못 해먹겠다.” 故 노무현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한 말이다. 전체 유권자의 30.5% 득표로 당선된 정권의 낮은 신임도는 이 같은 대통령 스스로 권위를 떨어뜨리는 언행 때문에 더 낮아졌다. 그 이면에는 국회의 여소야대 상황에 따라 정부정책이 전면적으로 무력화 된 상황이 있었다. 정부정책이 표류하면서 대통령의 지지도는 떨어졌고 답답한 마음에 내뱉은 말들은 기존에 대통령이 갖던 카리스마적 권위를 상실시켰다. 이후 이어진 탄핵정국은 탈권위주의를 기치로 삼은 참여정부에 혼란을 가중시켰고 불신임정국을 일상화시켰다. 이러한 문제를 몸소 체험한 노 대통령은 개헌을 통해 4년 중임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는 현 대통령제에 대한 회의가 담겨 있다. 87년 체제가 장기독재를 막기 위해 마련한 5년 단임제는 4년 임기의 국회의원 선거와 함께 엇갈리면서 끊임없이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어 왔다. 이런 현상은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권력분립과 견제를 실현한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미국처럼 여야 간 활발한 정책협조 분위기가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 첨예한 대립은 국정마비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성숙한 타협문화가 없는 현재 한국정치를 고려했을 때 이는 득보다 실이 큰 제도이다. 이러한 이유로 4년 중임제 시행과 대선-총선 시기를 맞춰 국정운영의 효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요구된다. 동시에 정부와 여권의 독선을 막기 위한 상설 견제장치 마련이 필요하다. 항상 보장되는 것도 아닌 여소야대 정국을 통해 정부를 견제한다는 것은 항시적으로 필요한 권력 견제의 공백을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대선, 총선의 시행시기가 다른 현재의 선거제도는 국정운영의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결점도 있다. 혹자는 대통령 임기 중 시행되는 총선이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가 되기에 긍정적 견제수단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소야대 국회에 의해 파행하는 국정운영의 책임을 물어 총선에서 대통령당을 심판하는 것도 정치적 책임소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국회의 독립성을 훼손한다. 4년 단임제와 양대 선거 시기를 맞추는 방안은 정부와 국회 간의 분할정부 출현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낮춤으로써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5년 단임제의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5년 임기보장은 무능하고 독선적인 대통령을 둔 국민들에겐 너무 긴 시간이다. 심판이나 재신임 기회가 없기 때문에 단발성 정책집행이나 조직적 부패 등의 무책임한 국정운영이 초래될 수 있다. 또 집권기회가 한번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여당의 차기 대선주자에 의해 조기 레임덕 현상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임기 내에 치적을 남기려는 대통령과 집권당의 정권재창출 노력이 서로 다른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4년 중임제는 4년 임기 후 중간평가가 가능하기에 정부의 책임감을 높이고 여론수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게 만든다. 또 재선의 가능성은 초선 4년의 레임덕 가능성을 차단하고 재선 2년 정도까지는 권력누수현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5년 단임제에 비해 상대적 우위를 갖는다.
군사독재 시대는 막을 내렸고 민주정치가 과거로 회귀할 가능성은 없기에 굳이 단임제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불신임 정국 일상화를 타개하기 위해 과거 3김과 같은 카리스마적 인물의 등장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문제해결을 위해선 상대 당을 진정한 협상의 대상으로 여기는 성숙한 정치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문제는 이런 문화가 정착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사회가 당면한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라도 4년 중임제 개헌의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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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사라진 사회
몇 달 전 인간이 지구 상에서 갑자기 사라졌을 때를 가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인간이 사라진 후 가장 먼저 멸종할 동물은 바로 애완견이었다. 야생에서 사냥해 본 적이 없는 애완견들은 굶주림 속에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거추장스럽게 길쭉한 몸, 그 몸에 비해 지나치게 짧은 다리 등 자연스럽지 않게 개량된 신체는 그들이 사냥은 고사하고 포식자로부터 도망가는 것조차 힘들게 만든다. 결국 자연스러움으로부터 괴리된 존재는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인간도 이 명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진데, 우려되는 것은 죽음과 괴리된 인간의 부자연스러운 삶이다.
사람들은 생명과 삶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 생명이란 생명체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에서 죽음은 배제하려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문명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삶에서 죽음을 격리시키려 노력해 왔다. 도축장을 따로 만들어 은밀히 죽음을 생산한다. 전쟁에선 칼이 살을 파고드는 생생한 죽음의 감촉을 피하기 위해 멀리서 총을 쏘더니 이제는 전투기와 미사일로 죽음의 광경을 회피한다. 심지어 병원이나 장례식장 또한 일상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죽음의 현장을 일상에서 분리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죽음을 일상적으로 보고 느끼던 사람들은 이제 죽음에 대한 면역성을 잃어버린 채 무균돼지로 가축화 한다.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 첫째로 일상에서 자연스레 얻을 수 있었던 죽음에 대한 면역력이 이젠 없기 때문에 갑작스런 죽음의 현장이 눈 앞에서 벌어졌을 때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 갑작스런 사고나 재난으로부터 인간이 겪게 되는 정신적 고통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구조 현장에 있던 많은 구조원들이 현재까지도 그 때의 참상 때문에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한다. 만약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상적으로 사냥을 통해 죽음과 대면했던 인디언들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그 정도로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렸을까.
둘째론 죽음으로부터 분리된 삶이 우리를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도축장에서 이뤄지는 죽음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하루에도 수 마리의 닭을 소비한다. 이러한 무감각은 죽음을 과잉생산 하는 결과를 만든다. 미사일 등의 첨단무기는 전쟁으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은폐함으로써 국민들이 전쟁을 쉽게 용인하도록 만든다. 죽음을 회피하려는 현대인의 노력이 역설적이게도 훨씬 더 많은 죽음을 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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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 One of sleeping style
고등학교 시절 하루는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고 너무 피곤해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잠든 적이 있다. 나중에 잠에서 깨어보니 이미 3시간이 흘러 집에 갈 시간이 되어 있었다. 반 친구들이 과학실습 하러 실험실에 가는 중에 내가 빠진 것을 몰랐단다. 너무나 곤한 잠이었기에 몸은 가뿐했지만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영원히 잠들었다면 어땠을까. 죽음이 잠깐 동안 나를 방문했다 돌아간 느낌이었다. 3시간이 아니라 30년을 잔다면 그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삶과 죽음의 구분이 잠든 시간의 길이에 달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삶과 죽음은 명확히 나누어 생각하지만 삶과 잠은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잠자고 있는 상태의 의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삶’이라는 단어에서 받는 느낌과 다르다. 그것은 잠이 감각의 세계에서 벗어난 죽음의 상태와 가까워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잠이란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어쩌면 잠이 죽음의 예행연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닿는다. 여기서 혹자는 잠은 다시 깨어날 수 있는 임시적인 상태이고 죽음은 다시 깨어날 수 없는 영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죽어보지 않고서야 자기가 다시 깨어날지 안 깨어날지는 모르는 것이다. 우리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나도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유추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잠의 또 다른 유사성은 자연스러움이다. 현대인들은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밤새도록 필사적으로 일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잠은 우리를 쉽게 다시 점령한다. 책상머리에 앉아서도 꾸벅꾸벅 조는 것이 자연스럽다. 마찬가지로 때가 되면 찾아 오는 죽음도 자연스러운 인생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삶을 존중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음 또한 존중하는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을, 이미 뇌사한 사람을 산소 마스크 씌워놓고 붙들고 있는 것은 진정 생명을 소중히 하는 태도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떠나는 사람에 대한 살아있는 자의 이기적 미련일 뿐이다. 죽음을 자연스런 생명의 과정으로 본다면 죽음도 여러가지 잠자는 스타일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