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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4.30 백설공주 (논제 - 현대판 백설공주)
- 2012.04.24 존재에 대하여
- 2012.04.24 가치론의 문제
글
박근혜 김정은 비판 비교 1
우리는 흔히 여론을 선동하는 행위를 일컬어 여론을 ‘조장’한다고 한다. 조장(助長)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맹자가 그의 제자 공손추와 정치에 대해 얘기하다 나온 일화에서 유례됐다. 중국 송나라에 성격이 급한 농부가 살았는데 그가 보기에 그의 논의 벼가 너무 더디게 자라는 것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농부는 어느 날 묘책을 냈고 논에 있는 모든 벼를 엄지 손가락 한마디만큼씩 위로 뽑아 당겨주었다. 농부가 늦은 저녁에 집에 들어와 자랑스레 이 얘기를 하자 농부의 아들은 깜짝 놀라 서둘러 논에 가보았지만 벼들은 모두 말라 죽어 있었다. 농부의 기준에서 ‘조장’은 벼가 빨리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으나 벼의 입장에서는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이처럼 자기 기준으로 섣부르게 남을 재단하려는 태도는 위험하다. 최근 박근혜를 겨냥한 독재자의 딸 대통령 불가론과 김정은에 대한 3대세습 비판 또한 자기 기준으로 섣부르게 남을 재단하는 여론의 ‘조장’이 아닐 수 없다.
근대 자연법 사상은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자유를 전제한다. 이러한 자연법의 원리에 따르면 ‘~해도 된다’가 기본이 되며 ‘~하면 안 된다’가 예외가 된다. 이러한 예외는 각 사회가 동의하는 방식과 절차에 따라 정당성을 얻어야만 인정된다. ‘독재자의 딸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 ‘김정은의 3대세습은 안 된다’ 등의 주장은 모두 각각 사회가 정하는 준거 틀에 따라 그 정당성 여부가 판단되어야 한다.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감정적인 여론선동이나 우리와 다른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닌 자연법적 기준 위에 각 사회가 가진 특성을 고려한 합리적인 비판이 요구된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의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헌법은 그 목적이 합리적이다. 이러한 실질적 합리성에 덧붙여 법이 목적달성을 위해 제대로 만들어져 있고 개인이 위법한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절차적 합리성은 획득된다. 실질적 합리성과 절차적 합리성이 모두 확보될 때 개인의 행위는 사회가 동의한 준거 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게 된다. 대한민국 헌법이 그 가치실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제헌 이후 60여년 역사가 잘 보여주기에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판단은 박근혜 개인에 대한 법적인 판단에 따른다. 헌법은 개인의 참정권을 보장한다. 40세 이상의 모든 국민은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박근혜는 대선출마가 가능하다. 헌법 13조 3항은 모든 국민이 자기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연좌제에 대한 헌법상의 금지는 아무리 독재자의 딸이라고 해도 그녀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박근혜가 아버지에게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생각을 핑계로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야권의 주장을 무력화한다. 헌법적 판단에 비추어 볼 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상대 대권주자에 대한 폄훼에 불과하다.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민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통치이념인 주체사상도 북한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로서 실질적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존에 고수해 오던 인민민주주의 헌법이 1972년에 사회주의 헌법으로 개정되면서 수상체제가 주석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는 주석 독재체제를 북한 헌법이 인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독재는 공산주의 사상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부터 파생되었으며 사회주의 혁명 완수를 위한 그들 나름의 합리적 절차로 여겨진다. 독재에 대한 법적인 인정은 존재하지만 권력세습에 대한 견제장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에 김정은의 3대 세습에 대한 법적인 하자는 없다. 혹자는 권력세습이 사회주의 이념과 맞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회주의는 정치제도가 아닌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문제이다. 지금껏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북한체제에 대한 섣부른 비판은 '조장'이 될 수 있다.
나의 기준으로 남을 멋대로 재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오만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한국에서 과거를 독재라고 비난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무시한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근거로 다른 체제를 비난하는 것 또한 다른 가치들에 대한 무지로부터 나오는 아집에 불과하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존하며 경쟁하자. 정말 나쁜 것은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다. 만약 정말 박근혜가 대통령감이 아니라면 대선에서 낙마할 것이고 김정은의 3대세습이 정당하지 않다면 북한 내부의 반발에 무너질 것이다. 상대에 대한 이해 없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말고 각자 나름의 방식이 있음을 인정하자. 사회의 발전이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말고 모든 시도들이 더 나은 사회건설을 위한 것임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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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행복
활짝 창문을 열었다. 한쪽 벽에 붙은 공책만한 창문. 시원한 바람이 별빛을 담아 들어온다. 음악이 조그마한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와 창 밖으로 들리는 전철소리와 뒤섞여 흥겨운 리듬을 만든다. 침대를 제외하곤 간신히 의자를 움직일 정도의 고시원 방은 어느새 화려한 무대가 된다. 속옷만 입은 채 온몸을 흔들며 덩실대는 내 모습은 스페인 그라나다 해변의 플라맹고가 부럽지 않다. 빨라지는 음악에 내 심장소리가 뒤섞일 즈음 내 발과 어깨는 이미 내 의지와 상관없는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행복. 달밤에 손바닥만한 고시원에서 팬티만 입고 춤추는 내가 느낀 것은 광기가 아닌 바로 행복이었다.
첫 번째 대입시험에서 낙방한 나는 홀로 상경해 조그마한 고시원에서 재수를 준비했다. 권토중래의 야망을 품고 내 몸을 뉘인 곳은 바로 창문이 없어 햇볕이 들지 않는 고시원 지하 방이었다. 해를 보지 못하는 그 작은 공간에서 나는 낮과 밤을 분간하지 못한 채, 시간관념을 잃고 곰팡내를 맡으며 홀로 침전했다. 우울증. 불면증. 탈모증. 내가 그 곳에서 겪은 것은 전엔 겪지 못했던 절망이었다. 결국, 나는 5만원을 더 내고 건물 5층의 창문이 있는 방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새로운 나의 보금자리로 모든 짐을 옮긴 후, 내가 한 일은 바로 창문을 활짝 열고 찬바람을 맞으며 춘 달밤의 댄스였다. 오랫동안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당연시했던 창문이 내게 돌아온 순간, 나는 주저 없이 일어나 온 몸으로 그 황홀함을 즐겼다. 인생을 돌이켜 보더라도 이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내가 재수를 결정한 것은 경쟁에서 패배한 나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명문대를 합격한 친구들에게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과 부모님의 실망은 내게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다. 중·고등학교를 피말리는 경쟁 속에서 다녔던 나의 행복은 저 멀리 대학입시에서의 성공으로 정조준 되어 있었다. 그런 나의 행복은 대입실패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꼭 명문대에 합격해 자랑스런 아들이 되어 돌아오겠다던 나는 출사표 같은 편지를 남기고 부모님 곁을 떠나 노량진 재수학원으로 흘러들어 간 것이었다. 일년 후, 누구나 인정하는 명문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행복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내가 온만큼 행복은 저만큼 물러나 있었다. 오히려 신기루같은 목표를 쫓아 헐떡이며 달리던 그 수많은 날들이 내 뒤에 전사자들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학점경쟁이 행복을 속삭이고 취직이라는 관문이 행복을 위한 선결조건이라고 사람들은 떠들어댄다. 하지만 이제 나는 믿지 않는다. 행복은 미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현재이지 결코 과거나 미래가 아니다. ‘옛날이 좋았지’라고 말하며 과거에 취해있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은 ‘미래에는 행복해질거야’라는 막연한 희망이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현재의 행복을 유보한다. 하지만 그 행복은 취직 후에도, 결혼 후에도 오지 않을 것이며 죽음 뒤에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지금 당장 의자에서 일어날지어다. 창문을 열고 음악에 맞춰 신나게 한판 춤을 추자. 정신 없이 추다 보면 막연한 희망이 아닌, 생의 감각으로서의 행복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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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딩스토리(10년 전 이야기)
2005년 웃긴대학에 올려 꽤나 흥행했던 작품ㅋ
중화야 기억 나는지 모르겠다만 그 땐 내가 미안했다.
수의사 된 것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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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종북논란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리 ~해봐야’의 의미로 ‘도무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의 어원은 19세기 천주교 신자들에게 행해진 ‘도모지’라는 사형방법으로부터 유래됐다. 몇 겹의 종이에 물을 묻혀 얼굴에 발라 숨이 막혀 죽게 만드는 이 형벌은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인 형벌이었다. 나와 다른 의견을 말한다고 하여 입을 막고 코를 막아 극도의 공포 속에서 죽게 만드는 이 방법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천주교를 말하면 죽는다’라는 메시지를 대중에게 심어주어 표현의 자유를 겁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정치권의 종북논란은 바로 이 도모지를 닮았다. 자신들과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종북이라 낙인 찍어 표현의 자유를 겁박하는 것은 얼굴에 도모지를 발라 아무 말도 못하고 죽게 만드는 형벌과 다를 바 없는 정치적 살해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북논란은 헌법정신에 비추어 봐도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언론과 출판을 포함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에 대한 검열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헌법 제 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갖는다’고 하여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다. 이러한 헌법정신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는 자연권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비록 헌법이 국가의 존립과 공공의 복리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고는 하나 그것이 자연권의 본질을 훼손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표현의 자유가 기본이고 국가존립을 흔드는 아주 긴급한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 예외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헌법의 기본정신에 비추어 볼 때, 현재의 종북논란은 예외가 본질을 압도하는 본말전도의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말한다 하여 싸잡아서 종북으로 낙인 찍는 언론 또한 예외조항을 확대 해석하여 헌법정신의 본질을 질식시키는 위헌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 이 상황을 헌법이 말하는 국가존립을 위태롭게 하고 공공복리를 위협하는 예외적인 상황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다. 근거 없이 여론의 뭇매를 맞는 민주통합당이나 통합진보당 비주류를 차치하고라도 통진당 당권파에게 위헌적 예외사항을 적용할 수 있는가. 물론 그들이 당내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것은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그건 당이 내부적으로 해결할 문제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당권파가 과연 헌법에서 말하는 국가존립과 안전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고 변란을 선동했는지는 의문이다. 만약 그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그들을 종북세력이라는 굴레를 씌워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박탈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벌어지는 논란은 헌법이 규정한 예외사항이라기보다 대선을 앞둔 정국을 색깔론으로 덧칠하여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얄팍한 술책에 가깝다.
무슨 일만 있으면 종북을 운운하는 현재의 매카시즘적 정치행태는 그 자체가 종북이다.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고 변화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야 할 정치권은 아직도 구시대적 색깔론에 매여 있다. 사고방식이 반북에 경도되어 있다면 그 자체가 북한이라는 존재에 종속되어버린 또 다른 종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종북이라는 낙인으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보수 우파 스스로가 자처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과도 배치된다. 오히려 그들이 혐오하는 북한의 사상통제와 다를 바 없다. 우리가 북한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널리 인정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소.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싸우겠소.”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였던 볼테르의 말은 표면적으로 그가 표현의 자유를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왜 죽음까지도 불사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관용의 실천으로부터 실존적 지위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상과 의견에 대한 관용은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아집으로부터 벗어나 더 넓고 깊게 사유하며 더욱 발전된 사회를 건설하게 만드는 강력한 추동력이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의견에 대한 관용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표현의 자유는 공허한 문구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면 종북논란이라는 정치적 파고 속에 표현의 자유가 질식하는 것을 방기하고 있진 않은지 스스로 돌아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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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인생 (논제-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경찰서 안이었다. 형사는 이것저것을 캐물었다. 매일같이 술을 마시면서, 자주 필름이 끊기곤 했지만 어제 밤 일은 대체로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흔들리는 재즈 바의 불빛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하던 밤이었다. 시계는 자정이 조금 못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한참 전부터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집으로 향하는 길목의 한적한 주택가에 다달아서였다. 내가 걷는 속도에 맞춰 뒤따라오는 발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살기.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골목에 들어선 나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의 발소리는 흡사 도마 위를 내리치는 칼날처럼 내 뒤를 쫓아 토막질 쳤다. 영문도 모른 채 쫓기게 된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녹색 철문에 가로막혔다. 철문을 흔들며 절망하던 찰라 문을 잠근 자물쇠가 잘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의아했지만 정신 없이 문을 열고 도망쳤다. 뒤에서는 여전히 긴 그림자가 내 발 밑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저기 눈 앞에 담 옆으로 붙은 양철 쓰레기통이 보인다. 딱 좋은 위치에 놓인 그걸 밟고 뛰어올라 잽싸게 담을 넘는다.
이제 주택가 한복판으로 나왔다. 숨이 막힌다. 쿵쾅대는 소리가 내 심장소리인지 놈의 발자국 소리인지 분간이 안 된다. 아무리 뛰어도 놈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결국 나는 어느 빌라 앞에 멈춰 서서 뒤를 보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아야만 했다. 검은 모자를 쓴 키가 큰 남자는 회칼을 들고 내 쪽을 향해 멈춰 섰다. 정적. 바람이 분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비도 제법 내리고 있었다. 놈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너 누구야?’ 나의 첫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대답처럼 회칼을 치켜든 그가 달려들었다. 본능적으로 뒤로 몸을 피하는 순간이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놈이 쓰러졌다. 위에서 떨어진 화분이 그의 머리와 함께 깨졌다.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마저 내 발을 잡으려는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하다.
나는 살인 용의자로 취조실에 있다. 그는 뇌진탕으로 즉사했다. 어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지만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 억울했다. 형사는 CCTV 자료를 보여주었다. 드디어 나의 억울함이 풀리겠구나 싶었던 나는 영상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CCTV는 지난 2주간 그 지역의 기록이었는데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내가 여러 번 찍혀있었다. 13일 전 밤에는 절단기로 녹색철문의 자물쇠를 끊고 있었고 4일 전에는 양철 쓰레기통을 몇 미터 옮겨 지금 위치의 담장 옆에 갖다 놓았으며 그저께 밤에는 그 놈이 죽은 그 자리에 초크로 X자 표시를 하고는 빌라 외벽의 가스관을 타고 올라 4층 집 창가 테라스에 위태롭게 화분을 올려놓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을 먹으면 자주 필름이 끊겼지만 아침엔 언제나 내 방 침대에서 눈을 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날카롭게 잘려진 필름들이 내 머릿속이 아닌 CCTV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형사의 눈엔 이 모든 것이 계획적인 살인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술에 취한 내가 미래를 예견해 죽음의 위기에 대비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내가 잃어버린 인생이라는 것이다. 잃어버린 인생.
그 고아같은 인생은 나를 살리려 한 것일까? 아니면 나를 감방에 가두려 한 것일까? 어쩌면 나를 원망하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쫓는 사이, 의자를 빼는 긴 긁힘소리와 함께 형사가 일어섰다. 책상 위로 피흘리는 '내 사진'을 내밀었다. "이건 피해자의 사진입니다." 순간, 정수리에 화분이 깨진다. 그림자에 가려 끝까지 보이지 않던 그의 모습은 놀랍도록 나를 닮아 있었다. 삶이 힘들다며 걸핏하면 술을 마셨던 나는 술에 취해 잃어버린 또 다른 나와 대면하고 있는 것일까. 기억할 수 없다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술에 취해 통제되지 않은 시간들은 세상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고 그것들이 쌓이면 결국 괴물이 된다. 그리곤 자신을 버린 책임감 없는 주인을 쫓아가 숨통을 끊으려 하겠지. 어쩌면 놈은 자기가 이 인생의 진짜 주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눈을 감았다. 이 모든 것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만약 꿈이라면, 혐오했던 한 조각이라도 다시는 내 인생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꿈이 아닐지라도 감방에서 술을 마실 수는 없겠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술에 무너져 가던 나를 살리려는 잃어버린 인생의 계획일지도. 형사는 내 손에 수갑을 채웠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차갑게도 생의 감각을 뒤흔든다. 확실히 이 순간만큼은 취중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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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의 길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기존의 왕권신수설에 대항해 사회계약설을 주장한다. 권력은 민중으로부터 나오며 인민의 안위를 지키지 못하는 통치자는 언제든 축출될 수 있다. 후에 이는 주권재민의 원리로 민주주의의 기본가치가 됐다. 하지만 이런 주권재민의 원리가 비단 정치의 영역에만 머무른다고 볼 수는 없다. 사회계약의 범위는 정치를 포함한 사회 전체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경제영역 또한 자연스레 사회계약의 범주에 포함된다. 결국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시스템도 사회 구성원들의 안녕과 번영을 조건으로 한 계약인 것이다. 문제는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사람들의 안녕이 아닌 자본의 증식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경제에서 인간은 소외되고 자본이 경제권력의 주인이 되는 주객전도의 장이 펼쳐진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도입한 자본주의라는 호랑이 새끼는 이제 자신을 키워준 주인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리바이어던의 군주가 민중을 보호하지 못하면 권좌에서 끌어내려지듯, 현재의 경제제도가 민중의 삶을 괴롭게 만든다면 얼마든지 교체되고 변형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 상에서 인간소외를 해결하고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바로 고용을 늘리는 것이다. 현재 정치권의 복지담론은 한국경제의 만성화된 저성장과 세계경제의 위기를 간과했다. 파이를 나누려면 일단 파이를 만들어야 하는데 현재 논의되고 있는 무상복지 등은 경제활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약화시켜 그나마 있던 파이마저 줄여버린다. 단순한 이전지출의 확대는 정부의 재정정책보다 경제적 파급력도 훨씬 작을 뿐 아니라 생산적이지도 못하다. 이는 고기 잡으려고 시도하는 사람의 눈 앞에 당장 피라미를 던져주어 고기잡을 의지를 꺾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눈 앞의 피라미가 아닌 낚싯대와 고기잡는 방법이다. 오히려 복지의 대상이 될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현 상황에선 최선의 방책이며 인간중심의 경제를 이루기 위한 첫 단추다.
문제는 헌법이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 참여를 보장하고 있다고는 하나 현재 한국의 고용률이 60%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법전의 명문적 자유와 현실에서의 자유는 그 간극이 너무나도 크다. 근대국가에서 정치영역의 참정권은 이미 19C에 보편화 됐지만 경제영역에서의 참경권(參經權)은 21C인 지금도 묘연한 실정이다. 이는 경제 민주화의 기반이 갖춰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낮은 고용률은 고용된 사람들과 고용되지 못한 사람들 간의 소득격차를 심화하고 이미 고용된 사람들 중에서도 비정규직 근로자와 같은 고용이 불안정한 사람들의 소득수준을 더욱 낮춰 소득분배의 형평성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또한 충분히 생산에 투입될 수 있는 인적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국가경제 전체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낮은 고용률의 이면에는 한국 특유의 재벌체제가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재벌기업의 막대한 자본투자는 제조업 부문에서 규모의 효율을 달성해 국내기업이 국제무대에서 충분히 경쟁할 수 있는 요건을 만들어 준다. 하지만 이러한 대기업의 효율성 추구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고용 없는 성장을 지속시켰고 이는 소득분배를 악화시키는 주요원인이다. 실제로 경제성장의 핵심인 제조업의 전체매출 대비 40%를 차지하는 상위 100대 기업의 고용기여율은 전체 고용의 2.2%에 불과하다. 더욱이 재벌그룹의 무분별한 문어발식 사업확장은 중소기업이 충분히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분야까지 침범하여 경제의 고용창출 능력을 저하시킨다. 동네빵집이나 분식업 등에 대한 재벌기업의 무분별한 확장은 사회 전체의 고용기회는 줄이면서도 대외경쟁력 향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이러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간과한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비교우위론이 비단 무역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시장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은 모든 산업분야에서 절대우위를 가질 수 있지만 그들이 더 잘하는 비교우위 부문에 집중하는 것이 국가 전체로 봤을 때 효율적이다. 하지만 이를 시장의 자율에 맡기면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에 의해 비교우위가 무의미해지고 고용은 더욱 줄어든다. 결국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해선 정부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역할분담을 유도해야만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역할분담은 고용은 늘리고 소득격차는 줄이며 산업부문별 대외경쟁력도 높이는 훌륭한 상생발전의 방법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재벌 대기업들의 무분별한 사업확장을 제한하여 중소기업들이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분야를 보호해야 한다.
자본주의에도 엄연한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을 지키는 한에서만 자본의 자유가 보장된다. 규칙의 범위와 강도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통해 30여년에 걸친 신자유주의 실험은 사망선고를 받았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규칙을 보다 확장하고 강화시켜야 할 때다. 정부는 고용촉진을 위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역할분담을 유도하고 재벌기업의 시장지배력 남용을 억제하여 경제권력을 자본으로부터 민중으로 되찾아 와야 할 것이다. 그것이 헌법이 보장한 경제 민주주의의 참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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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2020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논제-올림픽)
장내는 술렁였다. 2020년 올림픽부터 섹스를 정식종목으로 채택하자는 안건이 이건희 IOC 위원으로부터 나왔다. 모두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몇몇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 위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당황스런 주장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현재 대부분의 인류문명이 섹스를 금기시하는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했지만 이제는 전환기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미 포르노그라피가 온 미디어를 점령하고 있는 시점에서 섹스가 하나의 스포츠로서 양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건희 위원 옆에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 전위 예술가 멜라니는 “섹스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육체의 표현이며 다른 체조종목과 나란히 고려되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회의장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IOC 위원들은 서로서로 이 황망한 안건에 대해 논의하는 것 같았다. 캐나다 위원인 마이크가 “과연 한국이 그 종목에서 승산이 있을 것 같느냐?”고 비웃자 이 위원은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며 응수했다. 얼마나 빨리 하느냐 혹은 얼마나 오래 하느냐의 기록게임과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가의 연기종목을 복수채택 한다면 어떤 국가나 인종이 딱히 유리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케냐의 오딘 위원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는 무조건 찬성한다는 입장이다. 그리스의 스테파누스 위원도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은 여전히 말도 안된다는 입장이다. 특히 미국의 스티븐슨 위원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사회-문화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이는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의 문화가 아무리 전위적으로 바뀌고 K-POP의 선봉에 선 스타가 “섹스는 게임”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섹스는 절대 게임이 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라며 열변을 토했다. 카타르의 무바락 위원도 종교문제로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대립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IOC 사무총창인 크리스토프 케퍼는 내심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섹스가 만약 올림픽 정식종목이 된다면 IOC의 중계권료 수입은 기존의 곱절이 되고도 남을 것이었다. 하지만 IOC 미디어 정책담당관인 수잔은 섹스가 방송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관음증적 특성 때문이며 그러한 관음성이 거세된, 양성화된 섹스는 별다른 상업적 가치가 없을 것이라며 그를 만류했다.
논의는 찬반양론으로 갈려 스포츠가 무엇인지 그리고 섹스가 무엇인지에 대한 원론적이고 철학적인 논의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올림픽의 상업화가 아마츄어리즘의 근간을 훼손하고 이제는 오물을 끼얹으려 한다는 비난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유서 깊은 스포츠인 섹스를 이제는 올림픽이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의외로 회의는 찬반이 비등할 정도로 박빙이었다. 물론 이 의외의 상황 이면에 이건희 삼성 회장의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한 로비가 이미 진행됐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 시각 청와대는 IOC 회의장으로부터 들어오는 소식을 실시간으로 받아보고 있었다. 사실 섹스의 올림픽 정식종목화는 한국의 저출산 문제에 대한 극비의 대책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특별사면을 빌미로 다시 한번 IOC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대통령의 의중이다. 만약 섹스를 올림픽 정식 종목화한다면 피임률과 낙태율이 일정하다고 가정했을 때, 동-하계 올림픽 중계가 출산률을 높일 수 밖에 없다는 계산을 깔고 있었다. 정부의 여러가지 저출산 대책이 별 효과가 없자 목적달성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불도저 같은 대통령은 섹스를 스포츠의 반열에 올림으로써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명색이 올림픽인데 출산율이라도 확실히 ‘올림’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물론 이 순간에도 IOC 위원들은 한국의 진짜 문제는 까맣게 모른 채 섹스가 얼마나 운동이 되는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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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 (논제 - 현대판 백설공주)
동화는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운 것은 공주 한명이다. 그렇기에 동화는 아름답지 않다.
나는 왕비다. 사람들은 나를 왕비라고 쓰고 왕비호라 읽는다. 거울이 그녀를 비춘 순간 아름다움의 기준은 '눈처럼 새하얀'으로 바뀌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의붓딸인 그녀에게 다정했지만 그녀가 아름다움을 독점한 순간부터 그럴 수가 없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어서 그녀가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면 검은 피부를 가진 나는 비호감이 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어차피 아름다움을 두고 서로 쟁투하는 것이 우리 여자들의 속성이 아니던가. 오늘도 나는 TV에 나온 백설공주의 모습을 동경하는 동시에 인터넷 게시판엔 독사과같은 독설들을 내뱉는다. 그렇다. 독설공주. 나도 공주라는 것을 잊지 말라.
나는 난쟁이다. 키가 180이 되지 않는 루져이다. 어렸을 때 그 동화를 읽고부터는 키 큰 여자는 무조건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나도 그녀들의 늘씬한 모습을 동경하지만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무의식을 점령한지 오래이다. 트라우마. 나를 비롯한 모든 루져들은 백설공주를 경계한다. 여자를 사귈 때도 키가 큰 여자는 배제한다. 그것은 내가 그녀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어장관리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이다. 어차피 그녀는 내게 작은 관심들을 떡밥으로 던지다가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면 반짝이는 백마 뒷좌석에 탑승할 것이므로.
나는 왕자이다. 백설공주는 백마에 환장한다. 가난한 왕자이기에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백마를 렌트했다. 이마저도 내겐 부담스럽지만 신용카드는 내게 용기를 준다. 사실 그녀의 사랑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백마를 끌고 나타나 누워있는 백설공주에게 키스만 하면 그녀는 내게 넘어온다. 대게 공주들은 다 그렇다. 이미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그러했고 인어공주도 사실 해변가에서 백마를 타고 있는 나의 모습에 반한 것이었다. 평민인 신데렐라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다만 달콤한 키스와 뜨거운 사랑 뒤에 내게 남는 것은 카드 돌려막기와 신용불량자라는 딱지이다. 백마 없는 나의 진심은 공주는커녕 평민들도 받아주지 않는다.
나는 사냥꾼이다. 아름다움의 상징은 절대 죽일 수 없다. 나는 아름다워진 그녀를 풀어줌으로써 제 2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동물의 가죽을 벗기던 나의 칼솜씨는 성형술로 변모하였고 다양한 미디어로 외연을 넓힌 거울과의 동업은 우리 둘 모두에게 득이 되었다. 수많은 왕비들은 거울에 비친 백설공주의 모습을 보고 내게 찾아와 백설공주처럼 만들어 달라고 한다. 이제 와 고백컨데 사실 백설공주는 내 처녀작이었다. 어렸을 때는 단지 얼굴만 희다 했을 뿐인데 그녀가 왜 갑자기 예뻐졌겠는가. 처음부터 백설공주의 아름다움은 만들어진 것이었다. 내가 만들고 거울이 그 이미지를 아름다움의 표준으로 끊임없이 재생산하면 돈이 굴러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나는 백설공주다. 동화는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운 것은 한명의 공주이다. 오늘도 나는 이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보톡스라는 독사과를 맞는다. 그렇기에 동화는 아름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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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 대하여
1. 인간이 일차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정태적으로 보이는 시공간적 제한물(존재자)이다.
-> 인간은 일차적으로 감각기관을 통한 의식을 발달시켜 이차적으로 추상적인 의미들을 창조한다.
2. 하지만 지각할 수 없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사고실험을 통해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한을 지각할 수 없다고 하여 무한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존재할 수도 있다.)
* 세계 ; 인간을 포함하는 시공간적 무한개념
* 사고실험 ; 나는 지금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어떤 희귀새를 경험하지는 못하지만 그것들은 분명 존재한다.
< 존 재 >
존재는 시공간을 제한하는 동태적*인 무엇이며 존재자를 외부세계로부터 구분시켜주는 경계선이다.
*동태적 ;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를 의미
-> 이런 성격 때문에 무한한 것도 존재할 수 있고 세계의 무한성도 설명할 수 있다.
* 인간은 시공간적으로 유한하기 때문에 시공간적 무한을 경험할 수 없으며 그에 따라 인식할 수도 없다. (우리가 다루는 무한은 유한한 존재자들의 결합을 통해 미루어 짐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가짜 인식)
* 결국 인간은 세상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으며 세상조차 경험할 수 있는 범주까지를 존재자화하여 '세상'이라 인식하고 그 안에 나를 가둔다.
*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인식범위는 유한한 '존재자'에 한정된다.
존재한다는 것은 나의 의식에 의하여 인식될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는 없다. 비단 미신과 같은 것도 어떤 의미체로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 분명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생각의 작은 틈새를 발견할 수 있다. 그 틈새는 우리가 존재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하이데거가 분류했듯 존재를 존재와 존재자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존재자는 다시 물질계와 의미체로 재분류 할 수 있다. 존재에 대한 분석은 이 서로 다른 존재자에 대한 상이한 접근과정이 필요하다. 먼저 의미체로서의 존재자는 그 정의적 제한성을 내포한다.
즉, 의미체는 시공간적 제한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주요한 의미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물질계는 단지 하나로 존재할 뿐이다. 의미체의 도움 없이 물질계는 분절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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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론의 문제
재화는 그것이 가치가 있기 때문에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인간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교환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오랫동안 인간들이 겪어온 경험으로부터 나온
불확실한 추측이며 일종의 반사작용(물물교환, 또는 화폐를 통한
구매 경험 ; 두루뭉실한 유년기의 체험)이다. 재화는 그 스스로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상호과정 속에서
혹은 전적으로 인간의 해석 속에서 가치라는 허울을 걸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착각이 여러 사람의 공감을 얻고
그것들이 연쇄작용을 일으킬 때 경제는 실물경제에서 보다
높은 수준의 경제로 발전한다.
2009. 11. 15. 헌병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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