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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4.24 노동가치론 비판
- 2012.04.24 신자유주의의 진짜 문제
- 2012.04.16 봄 (논제-봄소식)
- 2012.04.16 교육과 TV의 관계에 대해 논하라
- 2012.04.13 장왜와개론 (논제- 000개론)
- 2012.04.13 닥치고 벗어! (논제- 닥치고 00)
- 2012.04.13 선택
- 2012.04.13 한국 역대 대통령 3명 이름 사용 작문
- 2012.04.13 1%
- 2012.04.13 방송의 공정성
글
노동가치론 비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느 재화의 가치를 생각할 때에는 그 재화가 나 자신에게 주는 효용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소로 그 재화의 희소성이다. 이와 다른 문제로 그 재화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노력의 문제도 존재한다. 이 세가지는 가치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까지 주류 경제학이 가치를 어떻게 다루고 있든 이 세가지 요소는 경제적 인간이 직관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가치의 가장 대표적인 명사들이다.
여기서 '가치'의 사전적 정의를 한번 짚고 넘어가 보자.
가치 (價値)【명사】
1. 값. 값어치.
2. 『철』 대상이 주관(主觀)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성질. 또는 정신 행위의 목표로 간주되는 진(眞)·선(善)·미(美) 따위.
3. 『경』 욕망을 충족시키는 재화의 중요 정도《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가 있음》.
1번은 가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고 2번과 3번은 효용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희소성은 수요와 공급의 문제에서 가격이 내포하고 있는 요소이기에 사전적으로도 가치에 포함된다. 하지만 이 가치의 사전적 정의에서 재화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노력, 즉 투하노동력에 대한 문제는 이끌어내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물건을 만들어 내는 사람의 노력의 정도가 그 가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직관적인 수준에서 그것은 그렇지 않다. 아직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뭔가 관계가 있어 보인다.
1. 효용
2. 희소성
3. 투하노동력
여기서 가격과 관계되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인가? 효용은 수요를 불러오고 희소성은 공급을 대변한다. 즉 물건의 가격은 효용과 그 희소성에 의해 결정될 확률이 높다. 가격이 가치를 상징한다면 수요-공급의 가격결정 매커니즘에 이번에도 투하노동력은 설 자리가 없다. 그렇다면 투하노동력이 위치는 어디인가? 이를 탐구하기 위해 먼저 가치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1. 사용가치
2. 교환가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gap은 무엇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인가. 일단 그것은 희소성으로부터 발생한다. 사용가치가 재화 내적인 가치라면 교환가치는 외적인 가치이며 이것은 희소성이나 사람들의 선호 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혹시 여기에 투하노동력도 포함이 되지 않을까? 사용가치가 재화와 인간의 일대일 대응을 통한 단순가치라면 교환가치는 인간 대 인간의 상관관계까지 고려한 복잡한 가치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직 시장에 던져지지 않은 재화에는 비교적 투하노동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시장에 던져지고 나면 투하노동력의 설 자리는 여지없이 사라지고 수요와 공급의 매커니즘에 의해서만 가격은 결정된다. 그리고 투하노동력의 존재는 오히려 무지한 몇몇의 경제주체들을 헷갈리게 하는 방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투하노동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 투하노동력은 가치를 추구하지만 가치와 정비례하지 않으며 유의미한 개연성을 갖는다. ]
사람들은 더 큰 가치(사용가치&교환가치 ; 시장에서는 교환가치를 추구)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며 높은 가치를 갖는 재화에 노동력 투입을 집중하게 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사회현상이기에 예외가 존재하기도 한다. (인간의 판단착오, 사회변화에 따른 재화의 상대적 가치변동 등)
예를 들면 인간의 가치추구는 일반적으로 가격을 기준으로 소득이 큰 재화의 생산을 지향하지만 생산결정과 생산물의 산출 사이에 발생하는 사회변동으로 그 가치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 또 다른 것으로는 가치의 척도인 가격정보가 부족한 상태, 즉 시장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재화의 생산에서는 생산자가 그 재화가치의 잠재적 믿음에만 의지하여 생산하기에 많은 노력을 들이고도 시장에서의 가치는 형편없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러한 사실은 가치가 큰 재화에 많은 노동력을 투하한다는 일반적인 원리의 역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운다.
즉, 높은 가치의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을 투하하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반대로 많은 노동력을 투하했다고 하여 그 가치조차 크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사회적 필요노동량은 여기서 오는 논리적 모순관계를 보완하기 위한 개념이기는 하나 논리관계를 역전시키기에는 부족하다.)
그리고 여기서 오는 착각(투하노동력과 가치는 비례한다)이 바로 노동가치론을 탄생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노동가치론은 그 논리적 모순 때문에 경제이론이라기보다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보필하는 선언적 주장에 가깝다.
2009. 11. 15. 헌병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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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자유주의의 진짜 문제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소득격차의 심화보다도 현재의 즐거움을 약탈한다는 데에 있다.
지나친 경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은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유보하는 행위로서 결국 미래의 즐거움은
죽음 이후에도 찾아오지 않게 된다.
2009.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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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봄 (논제-봄소식)
사건은 아무런 단서도 없이 마무리 됐다. 공군 헌병단 소속 특별수사관으로 파견된 내가 군산 헌병대에 도착해 수사에 착수한지도 2주가 다 되어가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한 병사의 의문의 자살. 일년이면 너댓번은 맡는 사건이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다.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같은 막사를 쓰는 병사들에 대한 취조에도 별다른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류민혁 일병. 평소 말이 별로 없는 내성적인 성격에 감수성이 예민했던 병사. 하지만 헌병대 내에서도 특별히 갈등이 있지도 않았고 시키는 일이 있으면 별 무리 없이 잘 해내던 평범한 사병이었다고 모두가 입을 모았다. 기대했던 부검결과마저 자살이라는 사실 외에 특이점이 없어 사건을 종결짓기로 했다. 부대 지휘관인 강소령은 자기보다 계급이 훨씬 낮은 나의 비위를 맞추느라 애를 썼고 어서 내가 부대를 뜨길 바랐다.
책상을 정리한다. 그 동안 쌓여있던 파일들을 박스에 넣고 테이프로 봉한다. 사건은 부적응 병사의 단순 자살로 마무리 되었다. 상부에서는 어쩐 일인지 사건을 빨리 마무리 하고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무언가 미심쩍다. 병사들도 지휘관도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겉으로는 여느 부대와 다름없어 보이지만 육감적으로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짐을 챙겨 차 트렁크에 싣고 강소령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나선다. 중대장실 앞에 들어서는 내게 김지훈 상병이 급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진중현 병장이 류민혁 일병을 성추행 하는 것을 '봄'. 새로운 '소식'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진병장은 지속적으로 류일병을 성추행하고 심지어 성관계를 요구하기까지 했다고 했다. 뭔가 실마리가 잡혀간다. 다른 병사들을 소환해 진 병장과 류 일병의 관계에 대해 집중추궁 했다. 처음에는 당황해 하던 병사들이 신변보호를 조건으로 사건의 전말을 실토하였다. 진중현 병장은 수차례에 걸쳐서 류민혁 일병에게 성행위를 요구했고 그 요구를 거부할 시 잠을 재우지 않는 방법으로 괴롭혔다. 구타는 물리적인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헌병수사에 대해 통달해 있는 헌병대 병사들은 직접적인 구타 외에도 여러 가지 가혹행위 수단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구조적으로 묵인되고 있었다.
진중현 병장은 구속되었다. 한 명의 내부고발자에 의해 생긴 균열은 견고한 성벽 같던 헌병대의 침묵을 무너뜨렸다. 김상병의 용기 있는 증언 뒤로 다른 병사들의 증언이 우후죽순 이어졌다. 군내 동성애는 엄격히 금지되며 성폭력은 엄중하게 처벌된다. 류일병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 진병장의 죗값은 무거울 것이다. 헌병단으로 돌아가기 전에 김지훈 상병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악수를 나누는 그의 낯빛이 어둡다. 그의 눈빛은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깊이 침전시키고 있었다. 슬픈 눈. 절친했던 후임병을 잃은 병사. 그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막사 뒤에서 떠나기 전 마지막 담배를 꺼내 문다. 부유하는 연기. 그 사이로 흙에 거의 묻혀있는 검은 잿더미가 보인다. 불태워진 유언장. 수사반이 도착하기 전, 진중현 병장이 유기하려 했던 것일까. 거의 불타 모든 내용을 알 순 없지만 일부는 알아 볼 수 있었다.
[ 그 놈은 어쩔 수 없었어. 그 일로 날 버리지마. 제발... 사랑해. 정말 견딜 수 없어…. 지훈이 네가 날 그런 눈으로 보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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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교육과 TV의 관계에 대해 논하라
공자는 논어의 ‘학이편’에서 배우는 즐거움에 대하여 언급했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 삶을 돌아볼 때 ‘공부하는 것이 즐겁다.’라는 명제에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 공부가 즐겁지 않은 이유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공부가 강제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교육은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다.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을 마쳐야 하고 그 성과에 의해 개인의 가치가 평가된다. 이러한 현실에서 공부는 국가에 의해 강제되고 부모에 의해 강요된다. 정작 공부를 해야 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이 즐거움을 느끼기에는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너무 큰 것이 현실이다.
공부하는 즐거움을 되찾기 위해선 공부의 주체가 먼저 외부의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유의 박탈로부터 벗어나 주체성을 되찾았을 때 개인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에 봉착한다. 그리고 그 자유 속에서 개인이 선택하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다. 배우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공자도 자기가 재밌어 했던 유교적인 원리들을 공부했기 때문에 그것이 즐거웠던 것이지 재미 없는 것을 다만 공부한다 하여 배우는 즐거움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부하는 즐거움을 위해서는 자유와 재미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TV는 공부하는 즐거움을 위한 두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시킬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먼저 TV는 채널과 프로그램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 적어도 TV가 제공하는 프로그램들 중에서는 개인의 선택에 대한 구조적인 강압이 없다. 또한 TV는 그 매체적 특성상 쉽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제공한다. 교육 콘텐츠도 예외가 아니어서 결국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살아남아 시청자들에게 제공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러한 자유와 재미가 TV라는 매체적 특성만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채널과 프로그램에 대한 선택권은 있다지만 다양한 교육 콘텐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택의 자유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국가는 평생 교육을 진흥해야 한다는 헌법 제 31조 5항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방송국들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통해 교육 콘텐츠를 늘려야 한다. 강제적인 의무교육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공부로 경감시켜야 사회 전체적인 공부에 대한 부담감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교육 콘텐츠를 늘린다 하여 아무런 원칙 없이 늘리면 안 된다. 재미가 보장되지 않는 교육은 시청자들의 선택의 자유 앞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는 교육 콘텐츠 개발과 동시에 재미없는 교육 프로그램의 도태도 필요하다. 만약 재미없는 교육 관련 프로그램들이 공영성을 내세워 자기 변호를 한다면 과연 교육이라는 공적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스스로 묻게 해야 할 것이다. TV를 통해 교육의 자유와 재미가 함께 보장 될 때, 우리는 진정 배우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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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왜와개론 (논제- 000개론)
강물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일렁이고 있었다. 하늘은 회색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여기저기서 풍악소리가 흘러나왔다. 촉석루에서는 왜병들이 여자들을 끼고 낄낄거리고 있다. 역시나 내가 바라는 세상은 오지 않는가.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붉은 치맛자락이 바람에 날려 피 냄새가 났다.-ml:namespace prefix = o />-ml:namespace prefix = o />
내 청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겠소. 왜장 게야무라가 말했다. 기생 중 가장 빼어난 미모를 가진 그녀에게 그는 자신의 둘째 부인이 되어주기를 청한다. 옆구리에 큰 칼을 차고 거친 갑옷을 입고 억센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얼마나 많은 피를 묻힌 칼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이것이 청혼이란 말인가. 협박과도 같은 몸에 대한 요구 앞에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게야무라의 눈을 노려봤다.
겨우 이것이 너희가 말했던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이냐? 독기 서린 그녀의 말에 왜장은 움찔했다. 너희가 오기 전까지도 나는 충분히 영욕의 삶을 살았다. 천한 신분으로 원하지도 않는 남정네들에게 웃음을 흘리고 살기 위해 몸을 팔았지. 세상이 바뀌면 이 짓을 하지 않아도 될까 싶어 너희 간사한 첩자 말만 믿고 진주성 성문을 열었다. 성 안 사람들 다 죽이고 너희들이 만든다던 새 세상이 고작 힘으로 위협해서 계집을 얻는 세상이더냐?
게야무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단지 그녀를 얻고 싶었다. 오랫동안 치열하게 벌어지던 공성전은 성 내부의 관기 하나가 문지기 병사를 꾀어 성 문을 열면서 허무하게 끝이 났다. 문을 여는 대가로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왜장 게야무라의 약속은 첩자를 통해 전달됐고 그녀는 살려둔 여자들 틈에 끼여 있었다. 그는 입성하기 전부터 순순히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던 그녀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동백같은 그녀의 미모에 홀려 연모의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고분고분 말 잘 듣던 그녀가 핏발세운 눈을 하고 독기 어린 말을 하다니 그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는 당신을 사모하오. 만약 내 부인이 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국 노예의 삶을 살다 강간당해 죽게 될 것이오. 게야무라는 그녀를 타일러 보려고 하였다. 결국 너희 왜국 남자들도 내 몸을 얻기 위해 겁박을 하고 위협을 하는구나. 네가 나를 사모한다고는 하나 너도 조선의 양반들과 다를 바가 없어. 결국은 제도나 물리적 힘으로 내 몸을 착취하려고만 하지. 너희들이 만든 세상에서도 한낮 노리개에 불과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볼에 눈물이 타고 흘렀다.
게야무라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싸움은 알았지만 사랑은 몰랐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발이 절벽 끝에 닿았다. 출렁이는 물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던 왜장은 그제서야 자기가 절벽 끝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순간 가냘픈 그녀는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게야무라는 재빨리 몸을 기울여 그녀를 잡았지만 그의 발도 이미 허공에 있었다.
붉은 꽃잎이 바람에 날린다. 논개와 왜장은 거꾸로 떨어졌다.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져 짐승 같은 물살 속으로 사라졌다. 무심히 강물이 흐른다. 세상을 거꾸로 뒤집으려던 두 남녀는 결국 자신을 거꾸로 던졌다. 그래서 거꾸로 떨어지던 그녀와 그의 모습은 ‘장왜와개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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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닥치고 벗어! (논제- 닥치고 00)
‘닥치고 벗어!’ 군의관은 윽박지르듯 내게 명령했다. 상명하복의 군대라 했던가. 헌법이 보장한 신체의 자유를 운운하며 그들의 요구에 불응하던 내게 그 군의관이 던진 한마디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바지를 내리고 있었다. ‘항문검사’라니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허공만을 응시하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 어릴 적에 옷을 갈아 입힐 때도 ‘닥치고’와 같은 과격한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저 사람은 어쩌면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 내 옷을 벗기려 드는 것일까.
그것은 내게 모멸감이었다. 지금껏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곳을 낯선 자에게 구석구석 관찰 당할 것을 생각하니 수치심에 눈꺼풀이 떨렸다.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성기는 목욕탕에서 아버지에게도, 형제에게도, 친구에게도 쉽게 내보일 수 있었다. 그것은 남자들끼리의 관계형성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또한 자발적인 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방적인 것이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를 제외한 백여명의 젋은이는 이미 허리를 90°로 꺾고 손으로 양 볼기짝을 잡아 군의관이 쉽게 그곳을 관찰할 수 있도록 ‘ㄱ’자 자세를 하고 있었다.
저들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실내체육관을 임시로 사용하는 거대한 검사장은 무거운 침묵만이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나의 반발 끝에 이어진 ‘닥치고 벗어!’는 2월의 공기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나는 아직 벗지 않았다. 입에선 허연 입김이 나왔다. 다른 입소자들의 입에서도 입김이 나왔다. 그들은 ‘ㄱ’자 자세를 하고 다리 사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지만 나를 응원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그만하고 빨리 끝내기를 바라는 원망 섞인 눈총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따갑다.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결단을 해야 했다.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바지를 내렸다. 나도 다른 입소자들처럼 ‘ㄱ’자 자세를 취했다. 감은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차례는 예상보다 너무 빨리 지나갔다. 군의관은 보는둥 마는둥 나를 지나쳤다. 확신컨데 그는 제대로 검사하지 않았다. 화가 치밀었다. 기껏 요구를 들어줬더니 그들이 꼭 필요하다는 그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무시당했다. 결연했던 나의 싸움은 웃음거리가 됐다. 모욕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절대 안 된다고 하던 내가 이제 와서 왜 제대로 보지 않느냐고 따질 수는 없으니까.
그 사건 이후 나는 왠지 힘이 없었다. 단지 시키면 하는 군인이 되어버렸다. 거세당한 강아지처럼 명령을 따랐다. 어쩌면 ‘항문검사’라는 과정은 압도적인 권력 앞에 가장 수치스러운 곳까지 까보이게 만듦으로써 개인은 아무것도 아닌, 단지 조직의 부속품임을 각인시키려 하는 것 아닐까. 헌법은 개인의 자유가 공공복리를 위해서만 제한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부디 나의 항문이 공공의 복리를 위해 공개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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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 | 2012.04.13 |
글
선택
나는 남자이기 전에 난자였다. 따뜻한 어머니의 몸 속에서 설레는 맘으로 그 날을 기다렸다. 대부분의 난자들이 짝을 찾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는 숙명적 사실조차 나의 설레는 맘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6월의 활기처럼 그 일이 일어났다. 수억의 정자들이 나를 향해 달려 왔고 가장 먼저 도착한 2~3개의 정자 중에 한 놈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나를 남자로 태어나게 했다. 이렇게 내 삶의 시작은 선택과 함께 왔다.
선택 받은 정자로서의 나는 나를 선택해 준 난자에겐 고맙지만 한편으론 불공평함을 느낀다. 난자는 가만히 기다리다 저를 위해 가장 먼저 달려 온 멋지고 강력한 몇 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때 정자이기도 했던 나는 정자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나의 난자를 두고 3~5억 개의 정자들이 경쟁을 벌인다. 난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죽음뿐이다. 비록 나는 그 경쟁에서 승리했지만, 그 때문에 비참하게 최후를 맞은 동료들을 생각하면 미안함에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선택과 함께 시작한다는 인간의 삶도 결국 그 끝은 정자들처럼 선택 권한이 없다.
삶을 둘러싼 선택의 문제는 이렇듯 인간의 탄생과정부터 시작되지만 우리 삶의 대부분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로부터 지구 반대편 나비의 날개짓까지 무한히 많은데 과연 나의 의도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아마 수억 분의 일인 정자의 생존확률보다도 더 적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인종이나 국적과 같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는 것들로 인해 남들이 나를 미워하거나 차별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애초에 난자도, 정자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을 가지고 남을 미워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얼마 전 중국인인 여자친구와 얘기하다 그녀가 국적으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많은 차별과 멸시에 시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적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왜 사람들은 그것으로 자기를 평가하냐며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사회가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외부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그녀의 눈물 위로 겹쳐졌다. 세계화와 고령화에 대응해 다인종 사회로의 변모를 선택한 한국사회의 현주소는 이토록 차가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우리 사회의 품이 조금은 더 따뜻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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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국 역대 대통령 3명 이름 사용 작문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사십 대 초입에 들어선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입가에 엷게 띤 웃음도 그대로였다. 그녀는 아직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동창회라고 모인 한정식 집 유리문 밖에서 안을 훑어 본다. 학창시절 친했던 동기 몇 놈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보였다. 어김없이 그녀도 그 곳에 약속처럼 앉아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눈웃음을 지으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옆으로 그녀의 남편이자 나의 친구인 태우가 보인다. 그는 그녀의 옆에서 멀뚱히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이 춥다. 하지만 선뜻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런 대화소리도 소리 없이 내려와 쌓이는 눈 밑에 묻혀버린다. 밖이 춥다.
그 날도 눈이 오는 추운 밤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두 살 많은 정희 선배와 함께 시내에서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맞고 있었다. 그 둘은 우리 동네에서 널리 알려진 연인이었다. 잘생기고 뭐든지 잘했던 정희 선배와 그녀는 제법 잘 어울렸다. 모두가 그녀를 연모했지만 누구나 그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선배는 그녀를 혼자 놓아 두고 길을 건너 빵집에 들어갔다. 그녀는 혼자 남아 눈을 맞고 있다. 나는 학원 창문 밖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이 되어 그녀의 어깨 위로 내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정희 선배가 다시 나온다. 횡단보도 앞에서 길 건너의 그녀를 보고 함박 웃음을 지으며 뛰어온다.
그것이 정희 선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그 트럭을 이미 보고 있었다. 피하라고 소리를 지를 수도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기 싫어서였을까? 정희 선배가 그렇게 떠나고 그녀의 눈은 텅 비어버렸다. 먹빛 눈동자만이 언제든지 굴러 떨어질 듯 보였다. 그녀의 옆의 빈자리는 휑했고 내게 그 자리는 너무나 커 보였다.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다.
눈이 오지 않아 더 춥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독서실에서부터 그녀를 따라 나왔고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와 함께 걸었다. 달도 별도 잘 보이지 않는 밤 가로등마저 깜박거리는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멀리 덜컹거리는 전철소리만이 여전히 시간이 가고 있단 걸 내게 알려주었다. 그녀 집에 가까운 골목 어귀였을까.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미끄러지듯 빠져 나간다. 그녀의 살결을 느끼는 순간 묘한 전율이 느껴졌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 전봇대에 밀쳤다. 그 때까지 아무 말 없던 그녀가 그제서야 왜 이러냐며 내 손을 뿌리친다. 오기가 생긴다. 나는 팔로 그녀의 목을 감싸 입을 맞추고 혀로 그녀의 입술을 더듬는다. 약하게만 보였던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나를 밀쳐내고 화난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도망친다.
그게 그녀와 내가 함께 했던 마지막 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었고 그녀는 광주에 남게 되었다. 십년쯤 지나고 친구 태우로부터 청첩장이 왔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녀의 결혼소식이었다. 결국 결혼식에 가지 못했다. 그 뒤로 그네들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춥다. 눈이 온다. 그날처럼 눈이 되고 싶다. 문을 밀고 들어 선다.
“야~ 전두환! 이놈아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글
1%
‘2% 부족할 때’ 내가 고등학생일 때 잘 팔렸던 한 음료수의 광고카피이다. 또 ‘2%’는 실제로 이 음료수의 이름이기도 했다. 체육시간, 친구들과 햇빛이 내리쬐는 운동장을 헐떡이며 달리다 경기가 끝나면 우리는 으레 자판기로 달려가 음료수를 뽑아 마시곤 했다. 나는 그 특유의 향 때문에 2%를 즐겨 마셨다. 그런데 그 때 꼭 돈이 없어서 음료수를 마시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 나는 그 친구와 번갈아 가며 향긋하게 갈증을 축여주는 그 놈을 사이 좋게 ‘드링켰다’. 친구와 반을 나눠 마셨으니 우리가 먹은 것은 더 이상 2%가 아니라 1%였다. 하지만 그 친구의 시원하다며 내뱉는 탄성과 내게 고맙다며 짓는 진심 어린 눈빛을 보았을 때, 내 에너지는 2%가 아닌 100%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1%의 나눔은 나에게도 너에게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이러한 1%의 의미는 보다 원초적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체로 자기 인생의 1%를 태어나기 위해 투자한다. 산모는 자기 인생의 1%를 한 아이를 위해 투자한다. 이 투자의 다른 이름은 나눔이다. 산모와 아기는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같은 음식을 나누고, 체온을 나누며, 숨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나눈다. 결국 나는 어머니와 인생의 1%를 서로 공유한 셈이다. 그러한 나눔이 있었기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다. 1%의 나눔은 이렇듯 생명을 배태하고 새로움을 창조한다.
얼마 전 신문에서 포스코 임직원들의 월급 1% 기부운동에 대해 읽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직원들로서 그보다 못한 형편의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월급의 1%를 기부한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이미 태어나면서 진 1%의 빚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일까? 1% 대 99%의 사회라고 한다. 1%의 사람들을 위해 99%가 봉사하는 사회, 뉴욕 월가의 ‘점령하라’ 시위는 1%와 99%로 나뉜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사회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나뉘었지 나누지 않는다. 상위 1%의 사람들이 과연 그들 가진 몫의 1%라도 나누는가? 나누지 않는 사회는 나뉘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나뉜 1%는 다른 99%에 의해 점령당할 수밖에 없다.
%는 이미 나뉨을 배태하고 있다. 전체로부터 일부분을 떼어놓는 사고방식은 %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기호의 모양 또한 작대기( / ) 하나가 두 개의 동그라미(ㅇㅇ)를 나누어 놓는다. 문제는 이렇게 나뉘어진 두 동그라미가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타(他)와 아(我)의 구분은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고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하나가 되는 것은 그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야 내가 태어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랴. 그런데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나눠야 한다. 부부는 이불을 나누어 덮어 하나가 되니 나눔은 하나가 되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과도하게 나뉘어져 있다. 이제라도 더 이상 나눠지지 말고 나누자. 1%를 나누어, %보다는 1에 집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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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방송의 공정성
봉이 김선달은 넘실대는 대동강 물을 황송아지 60마리 살 수 있는 돈을 받고 팔았다고 한다. 단지 설화인지 실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 사유재산권의 개념이 사람들에게 어수룩하게나마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는 강물이 사유권이 인정되지 않는 공유자원임을 익히 알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중요한 자원으로 떠오른 전파 또한 공유자원이다. 전파는 경합성과 비배제성을 모두 지니는 공유자원으로서 만약 전파의 사용을 자율에 맡겨 놓는다면 전파의 대역대가 중첩되어 아무도 자신들의 사용목적에 맞게 전파라는 자원을 활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특정 사업자에게 전파의 독점적 사용권을 부여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공공 서비스로서의 방송을 요구한다. 방송이 공정해야 하는 것은 공유자원인 전파의 소유권이 어느 한 개인이 아닌 모든 시민들에게 있기 때문이며 공정하지 못한 방송은 애초에 독점적 사용권을 부여한 시민과의 계약을 위반한 것이다. -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그렇다고 방송사에 공정성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 애초에 방송 사업자는 사익을 위해 주파수에 대한 독점권을 구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방송에 공정성만을 바라고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공정하지 못하다. 시민과 개인 간의 교환관계의 산물인 방송의 성격 상 시민들은 방송의 자율성 또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방송사는 이 자율성을 기반으로 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자율성과 공공성이 대립되는 개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방송사가 자율성을 이유로 공정성을 침해한다면 시민사회에 지불하는 공공 서비스의 가치가 줄어들 것이고 애초 계약과 다른 불량품에 높은 가격을 지불한 시민들은 환불을 요구할 권리를 지니기 때문이다. 방송사는 공정성을 유지하는 선에서 자율성을 추구해야 한다. 방송의 자율성 속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이 공정할 때 시청자들은 그 방송사를 신뢰하게 되고 이러한 높은 신뢰도는 시청률과 높은 수익으로 이어진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방송의 공정성과 사익을 위한 자율성은 충분히 양립 가능하다.
공자가 ‘춘추’에서 노나라의 역사를 기술할 때에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는 동시에 대의명분에 맞는 주석을 달았던 것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 공정성의 본질은 이러한 춘추필법과 닮아 있다. 방송 제작자는 객관적인 사실과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균형감각을 바탕으로 공공의 이익이라는 대의명분에 맞는 방송을 제작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한쪽 입장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의견을 배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현상을 포착하여 전달하는 과정에서 완벽히 중립적인 입장에 있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방송 제작자가 현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에 따라 사안의 성질은 달라지며 균형점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상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통해 시민들의 이해를 돕는 것이 시민과 방송사 사이의 교환관계를 공정하게 하는 것이다.
사회 간접자본으로서 방송은 공정성을 갖출 때, 그 질이 향상되고 국가의 생산성을 고양시킨다. 이러한 생산성은 비단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전 부문에 미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방송의 공정성이 더욱 절실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이다. 전파라는 공유자원을 주고 받은 물건이 진품인지 짝퉁인지 확인하는 일은 시민인 우리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이지 누가 대신 해주지 않는다. 만약 그 것이 짝퉁이라면 우리는 당당하게 환불을 요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요즘 진행 중인 언론사의 파업은 오히려 방송 제작자들이 나서고 시민들은 이를 관전하는 양상이다. 주객전도의 기현상을 목도하며 그나마 방송 제작자들에게서 춘추정신을 읽는다. 공정성은 방송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가 만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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