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덴마크, 비결은 '플렉시큐리티'

한국경제 2013. 12. 6. 23:58



덴마크 소도시 베어링브로의 펌프업체에서 근무하는 댄 로리슨(32). 6개월 전에 입사한 그는 원래 중소 해운회사의 사무직원이었다. 전 직장의 경영 사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말 구조조정 차원에서 갑작스레 해고 통보를 받은 것. 지난달 현지에서 만난 그는 뜻밖에도 “해고 당시 미련은 조금 남았지만 실직이 두렵지는 않았다”며 “덴마크는 노동자를 해고하기 가장 쉬운 나라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나라”라고 힘주어 말했다. 어떤 이유 때문일까. 그는 망설임 없이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 덕분이라고 답했다.


○갑자기 해고당해도 두렵지 않은 나라


플렉시큐리티는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전성(security)을 합친 말로 기업의 고용과 해고가 자유로우면서도 사회안전망을 통해 실직의 충격을 완화하는 덴마크의 독특한 노동시장 모델이다. ‘안전한 해고’쯤으로 이해된다.


실제 덴마크 기업들은 다른 국가에 비해 근로자 해고가 자유롭다. 근속기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해고 한두 달 전에 통보만 하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해고 근로자들이 생존권을 위협받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일은 없다. 직장을 잃더라도 국가가 최대 2년간 이전 직장 임금의 80%를 실업수당으로 지급하기 때문이다. 로리슨도 해고와 동시에 정부로부터 실업수당 지급 대상자로 지정돼 수당을 받으며 기술을 익혀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했다.


덴마크 행복연구소는 올해 출간한 보고서에서 플렉시큐리티를 덴마크가 행복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꼽았다. 행복을 위협하는 근본 요인인 고용 불안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실제 유엔의 행복도 조사에서 덴마크는 지난해부터 2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로 뽑혔다. 


○시장 자율성 높여 일자리 창출


플렉시큐리티는 1994~1996년 높은 실업률을 해결하기 위해 덴마크 정부가 노동시장 개혁으로 도입한 제도다. ‘자유로운 해고’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지만 오히려 고용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유연한 노동시장 때문에 기업은 부담 없이 채용을 늘릴 수 있었다. 통계상으로도 1993년 9.53%였던 실업률은 꾸준히 낮아져 2008년 경제위기 직전에는 3.47%까지 떨어졌다.


코펜하겐에서 만난 덴마크 정부 관계자는 플렉시큐리티의 성공 비결을 ‘호박벌’에 비유했다. 그는 “호박벌은 날개에 비해 몸집이 너무 커 과학적으로 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며 “전통적 경제이론에서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고용의 안전성이 양립하는 것은 모순이지만 덴마크는 호박벌처럼 통념을 깨고 ‘노동 유연성=고용 불안’이라는 등식을 뒤집었다”고 강조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영미식 시장경제의 유연성과 유럽의 엄격한 고용 보호를 절충하는 제3의 모델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플렉시큐리티는 △유연한 노동시장 △관대한 실업급여 △적극적인 취업 지원 등 3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노동자 해고가 쉬운 대신 정부가 충분한 실업급여로 생활 안정을 보장한다. 실업수당 지급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는 국가의 적극적인 취업 지원을 통해 해결한다. 


해고당한 노동자는 자동으로 정부의 직업교육 프로그램에 편입된다. 교육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갖춘 노동자가 새 직장을 찾지 못할 경우 정부가 일자리를 제공하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 한 직장에서 1년을 못 채우고 퇴사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관대한 실업급여의 허점을 보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다.


○기업 경쟁력도 강화돼


피터 뤼스홀트 한센 주한 덴마크 대사는 “변화무쌍한 글로벌 경제환경에서 유연한 노동시장 덕에 기업의 경쟁력은 강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기업들이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대 해운사 머스크를 비롯해 첨단 풍력터빈 업체 베스타스, 세계 시장 점유율 50%의 인슐린 제조회사 노보노르디스크, 유명 완구업체 레고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세계 141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국가별 기업 환경 분석에서 덴마크를 뉴질랜드에 이어 ‘기업하기 좋은 나라’ 2위로 선정했다. 결과적으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덴마크를 1인당 평균소득 5만8000달러의 부국으로 만든 셈이다.


노동시장의 탄력성 외에도 기업에 대한 낮은 규제 수준, 외국 기업에 대한 높은 개방성, 높은 기술력도 덴마크 기업 환경의 이점으로 꼽힌다. 실업급여 등 사회안전망 때문에 소득세율(34.81%)은 높지만 법인세율(25%)은 미국(39.1%), 프랑스(34.4%), 독일(30.2%)보다 낮은 편이다.


○세계 경제 위기에 도전받는 행복국가


물론 플렉시큐리티가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잘 나가던 덴마크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타격을 입었다. 지난해 덴마크의 경제성장률은 -0.38%를 기록하며 뒷걸음질친 데 이어 올해도 0.1% 성장에 그칠 전망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로 수출이 급감해서다. 2008년 이전 3%대를 기록하던 덴마크의 실업률은 올해 다시 7.1%까지 치솟았다.


자연 플렉시큐리티가 재정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실업수당 지급이 늘어나 정부의 재정 부담을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GDP 대비 27% 수준이던 덴마크의 정부 부채 비율은 2012년 45%로 늘어났다. 한센 대사는 “만약 플렉시큐리티가 없었다면 불황에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나앉았을 것”이라며 “플렉시큐리티가 불황에는 사회안전망으로 실업자를 보호하고 경기 회복시 빠르게 고용을 늘려 노동시장의 스펀지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진행되고 있다. 2011년 들어선 사민당 정부는 플렉시큐리티의 큰 틀은 유지하면서도 기존 4년이던 실업수당 지급 연수를 지난해 2년으로 줄였으며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법인세율을 현행 25%에서 22%로 낮추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헬레 토르닝 슈미트 덴마크 총리는 “우리가 선택한 길이 비록 인기는 없을지라도 반드시 가야 할 옳은 길이라고 믿는다”며 “기존 노동시장 정책의 장점은 유지하면서도 긴축을 통해 재정 건전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 플렉시큐리티


flexicurity.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전성(security)의 합성어로 사회안전망을 통해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덴마크의 고용복지 제도. 정부는 기업에 ‘해고의 자유’를 줌으로써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고 노동자에게는 실업급여와 직업교육을 통해 생활 안정과 재취업 기회를 제공한다.


코펜하겐·베어링브로=박병종 기자 ddak@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 2013.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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