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VS구글) 스마트워치의 명품가치 흡수전략

IT이야기 2015. 3. 10. 16:54


"스위스 시계 산업은 위기에 처할 것이다."


지난해 9월 애플이 애플워치를 소개하기에 앞서 디자인을 총괄한 조너선 아이브 애플 수석 부사장은 이렇게 호언했습니다. 스마트워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스위스 시계가 전복될 것이라는 자신감! 스위스 시계 업체들은 내심 가슴 조리며 애플워치의 등장을 지켜봤습니다.


당시 애플워치는 원형 프레임으로 나올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사각형의 프레임으로 나왔지만 기존 삼성 기어 시리즈 등 IT 기기 냄새가 진하게 나는 제품과 달리 산뜻한 디자인과 용두를 이용한 인터페이스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9일 드디어 애플워치의 사양이 공개됐습니다. 지난해 9월에 비해 별다른 내용이 없자 국내 언론은 "혁신은 없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혁신은 없었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번 발표는 지난해 내놓은 내용에 대한 세부사항을 밝히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애플워치의 용두를 이용한 인터페이스나 애플페이를 이용한 결제 시스템, 여러 헬스케어 애플리케이션(앱·응용프로그램) 등은 여전히 우리 삶을 바꿀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패션은 OK, 명품은 글쎄?


진짜 문제는 스위스 시계산업을 정조준하고 있는 애플의 전략입니다. 시계산업은 이미 명품산업이 돼버렸습니다. 실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분야는 스위스의 명품 기계식 시계입니다. 현재 1000 스위스프랑(약 110만원)을 넘는 손목시계의 95%가 스위스산일 정도입니다. 스위스 시계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판매량 기준으로는 2.5%에 불과하지만 매출 점유율로는 54%에 달합니다. 손목시계가 자동차와 더불어 남성의 자존심이 걸린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잡으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애플은 이같은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애플은 1900만원짜리 애플워치 금장 에디션을 내놓는다고 선언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들은 애플이 명품시장에 도전한다고 보도했습니다. 


애플은 지난해 5월 버버리의 최고경영자(CEO)였던 앤젤라 아렌츠를 리테일·온라인 판매 부문 수석부사장으로 데려온 데 이어, 지난해 말에는 버버리에서 디지털·인터랙티브 디자인을 맡은 체스터 치퍼필드를 영입했습니다. 앞서 2013년에는 이브생로랑의 CEO 출신인 폴 드네브를 영입했죠. 애플워치를 명품 패션 아이템으로 만들겠다는 복안입니다.


하지만 유명 디자이너 몇명 영입하는 것으로 명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명품시계 산업을 지탱하고 있는 스위스 기계식 시계의 역사는 200년이 넘습니다. 스위스 시계의 가치는 손목의 운동에너지를 동력으로 쓰는 오토매틱 기계식 시계의 섬세한 기술만이 아닙니다. 핵심은 오랜 역사와 전통으로 다져진 '명품의 아우라' 그 자체입니다.




▷시계산업의 핵심은 '기호가치'


명품의 가격이 턱없이 비싼 이유가 있습니다. 나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별시켜주는 기능입니다. 평민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명품잡화를 착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지위를 과시할 수 있고 스스로 우월감을 느낄 수 있죠. 이같은 기능으로부터 나오는 가치를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장 보드리야르는 '기호가치'라고 불렀습니다. 


경제학계에서는 재화의 효용을 근거로 수학적 분석 모델을 도입한 한계효용학파 이전에 줄기차게 나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애덤 스미스가 제기한 물과 다이아몬드의 딜레마였죠. 분명 물이 인간에게 더 필요하고 가치있는 것 같은데 왜 다이아몬드의 가격이 더 비싸냐는 것이었죠. 가치론으로 들어가면 물의 사용가치가 다이아몬드보다 큰데 교환가치(가격)는 왜 거꾸로 나타나는가죠.


한계효용학파는 '한계효용'이라는 개념과 수요공급 곡선을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물은 수요에 비해 공급량이 많지만 다이아몬드는 수요에 비해 공급량이 적어 가격이 높게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나요? 이 설명에는 정작 왜 다이아몬드 수요가 많은지에 대한 설명은 쏙 빠져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보드리야르의 기호가치입니다. 저는 물건의 가치(교환가치·가격)를 사용가치 측면에서만 보지 말고 사용가치와 기호가치의 합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재화의 효용은 대체로 사용가치로부터 발생하지만 명품과 같은 특정 재화의 효용은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로 인해 결정됩니다. (참고로 기호가치는 남과 나를 쉽게 구분지을 수 있을 때 발생합니다. 명품이 대체로 패션잡화나 자동차 등에 집중되는 이유죠.)


명품시계와 물리적으로 완전히 같은 SA급 짝퉁의 가격과 진품 가격의 차이는 기호가치의 차이로 볼 수 있습니다.(짝퉁이라는 사실로부터 발생하는 부정적 이미지를 소거한다면)



시계의 기능을 의미하는 사용가치와 달리 기호가치는 물리적인 생산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광고·마케팅 회사들이 멋진 모델과 전설적인 스토리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기호가치의 생산이 미디어를 통한 문화적인 방식을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브랜드 가치는 기호가치와 상통합니다.)


결국 기호가치는 단시간 내에 자본을 쏟아붇는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격만 높이는 방식으로 과시하기 좋아하는 일부 부자들을 노릴 수는 있지만 명품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적어도 수십년 이상의 명성을 쌓아야 비로소 명품의 아우라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죠. 톰 포드 등 비교적 역사가 짧은 브랜드도 디자이너 개인의 명성과 스토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애플이 가진 브랜드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으나 명품시장에서의 명성은 IT 산업의 것과는 다릅니다. 애플은 명품산업은 물론이거니와 손목시계를 만들어본 경험도 전무합니다. 걸음마도 떼지 않은 아기가 마라톤 우승을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죠.


▷개방적 OS의 필요성 - 구글 안드로이드웨어


스마트워치가 보편적인 생활방식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특히 가방에 스마트폰을 넣고 다니는 여성들은 알림 기능만으로도 유용하죠. 문제는 애플이 현재의 전략을 고수할 경우 애플워치와 기존 명품시계 중에 택일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시계는 왼쪽 손목에 차는데 여기에 스마트워치와 명품 시계를 동시에 차는 것은 우스꽝스럽습니다. 상황에 맞춰 번갈아 차기도 귀찮습니다. 결국 스마트워치와 명품 시계는 하나로 합쳐져야 합니다. 


애플은 스마트워치를 명품으로 만드는 방향을 택했고, 스위스 시계업체들은 명품 시계에 스마트워치 기능을 도입하는 방식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미 프레드릭콘스탄트, 알피나, 파슬 등이 스마트워치 기능을 가진 기계식 시계를 출시했습니다. 세계 최대 시계 기업인 스와치 그룹은 올해 독자적인 스마트워치를 내놓을 예정입니다.



시계 업체들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기계식 시계의 기호가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스마트워치를 만들 수 있을지입니다. 여기에 효과적인 솔루션을 제시한 기업이 있습니다. 한국 스타트업이면서 오히려 해외에서 인지도가 높은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워치는 2가지 방법으로 명품 기계식 시계와 스마트워치를 결합시킵니다.


△첫째는 기계식 시계의 유리를 투명 디스플레이로 만들어 평소에는 명품시계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터치할 경우 스마트워치로 전환되는 방식입니다. △두번째는 스마트워치 기능을 갖춘 시계줄(T밴드)을 이용해 기존 기계식 시계를 스마트워치로 바꿔주는 방법입니다. 가보로 내려오는 100년 넘은 시계도 스마트워치로 변신합니다. 이미 여러 시계 업체들이 카이로스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카이로스가 물리적인 방식으로 스위스 시계업체에 살길을 열어줬다면 소프트웨어 방식으로는 구글 안드로이드웨어가 있습니다. 스마트폰 산업에서 후발주자로 나선 구글이 개방적인 OS로 기존 휴대폰 제조사에 살길을 열어주며 시장을 석권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19일 태그호이어는 구글의 안드로이드웨어를 적용한 기계식 시계를 연내 내놓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스마트폰과는 달리 기호가치가 중요한 시계 산업의 특성상 기존의 제조사를 이용하면서 플랫폼을 장악하는 편이 훨씬 유리합니다.


▷시계 산업의 기호가치 지키기


혁신적인 제품은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바꿔놓음과 동시에 시장의 규칙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합니다. 애플워치가 혁신적인 앱들을 내놓는다면 마셜 맥루한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는 보편적인 도구가 될 것입니다. 다만 명품의 기호가치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힘으로 스위스 시계를 누른다면 자칫 시계 시장의 파이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명품 애호가라고 해서 명품의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는 1900만원짜리 애플워치 금장 에디션을 살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입니다.(반면 명품 라인에 해당하지 않는 애플워치 스포츠 등은 중저가 시계 시장을 장악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금장 시계줄이 대중성에 기반한 제품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명품시계를 차던 사람들이 스위스 시계의 기호가치 대신 애플워치의 혁신적인 사용가치를 선택한다면 600억달러에 달하는 기존 손목시계 시장은 급격히 쪼그라들 것입니다. 기호가치가 거세된 시계 시장은 사용가치 덩어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애플이 기존 명품시계 업체들을 포섭해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시계산업의 기호가치를 지키면서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방식입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시계산업의 기호가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시장의 다양성을 지키는 길이지요. 기호가치는 다양한 스토리를 가진 명가들이 각자의 개성과 기품을 자랑하며 겨룰 수 있을 때 자라납니다. 그런데 애플은 스마트워치에서도 특유의 폐쇄적인 정책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스마트워치 전쟁에서 애플이 잘못된 길을 택했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박병종 기자  dda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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