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 권리

논술작문 2012. 8. 21. 16:20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상처가 나면 새살이 돋듯 정신적인 상처는 망각을 통해 극복한다. 그러나 사람은 또한 역사를 기록하는 존재다. 과거를 기록하고 그 것으로부터 지혜를 찾으며,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우리에게 역사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과거를 잊는다면 오늘의 일을 판단할 수조차 없기에 망각과 기억은 조화로운 공존이 필요하다. 인터넷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요즘, ‘잊혀질 권리라는 이름으로 망각과 기억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이는 기존에 뇌가 자동적으로 해 오던 망각 기능을 인터넷이 스스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한번 올라온 콘텐츠는 세월이 지나도 자동으로 폐기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적극적인 삭제노력이 없으면 언제든지 과거의 일들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인터넷의 특성은 한번 실수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굴레를 씌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받으면 그것으로 그 사람은 사면-복권 되도록 법은 정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인터넷 언론이 그 사람의 범죄사실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그는 평생 범법자라는 낙인을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는 죄형 법정주의와 이중처벌 금지의 법리와 모순되면서 법치주의의 실효지배를 약화시킨다.

 

 헌법 제 10조는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한다. 만약 범법자가 법정에서 판결한 처벌을 이미 받았다면 그에게도 행복한 삶을 살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헌법 제 21조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만약 무차별적으로 과거기록을 난도질 한다면 형법으로 처벌받지 않는 인터넷 상의 표현들은 무책임해질 수 있다. 책임감 없는 표현의 자유는 자칫 방종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또한 과거의 기록은 역사물이라는 점에서 공익성을 띠는데 이를 삭제할 자유를 개인에게 준다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 자유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이렇듯 두 가지 기본권은 서로 상충하며 미래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묻는다. 어느 한가지 권리가 다른 권리를 압도할 수 없기에 결국 둘 간의 적절한 타협점이 필요하다. 이에 1980년 스위스 연방법원의 판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1939년 사형선고를 받은 아버지의 아들이 스위스 TV방송에 아버지의 사형선고 보도를 제한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법원은 사형수 자식으로서 명예감정을 인정하여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법원이 이런 판결을 내린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과거사실에 별다른 공익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행복을 가로막는 극단적 영향에 비해 그 공익적 가치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 판례는 현재의 잊혀질 권리논란에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 잊혀질 권리는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망각하면 안 된다. 매킨타이어는 인간을 서사적 존재로 규정한다. 과거를 잊은 인간은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자기가 나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모인 사회도 마찬가지다. 뇌가 선택적으로 기억을 지우듯 인터넷 상의 기록도 선택적으로 삭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 기준은 위의 예에서처럼 기록의 공익적 가치가 되어야 한다. 기억해서 사회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을 대상으로 잊혀질 권리를 허용하는 방안이 가장 현실적이고 적절한 타협점이 될 것이다.

 

'논술작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은 마음이다 (논제)  (0) 2012.08.28
경제적 약자를 위한 시장개입은 정당한가  (0) 2012.08.25
4년 중임제 개헌  (0) 2012.08.18
죽음이 사라진 사회  (0) 2012.08.14
죽음 - One of sleeping style  (0) 2012.08.14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