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옌훙 바이두 회장, 실리콘밸리의 유망한 엔지니어…호텔방서 중국형 검색엔진 개발

한국경제 2014. 3. 26. 10:57


지난달 초 중국 재계에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다. 리옌훙 바이두 회장이 부동산 재벌 왕제린 완다그룹 회장을 제치고 중국 부자 순위 1위에 오른 것. 중국에서 정보기술(IT)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최고 부자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블룸버그 억만장자지수’에 따르면 리 회장의 재산 규모는 122억3145만달러다. 1년 만에 65%나 증가했다. 음료기업 와하하의 쭝칭허우 회장을 제치고 2위 자리에 앉은 지 14일 만에 1위 자리까지 올랐다. 미국에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최고 부자가 되면서 미국 성장산업의 지형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처럼 중국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체 리옌훙은 어떻게 바이두를 성공시켰을까.


○도서관에서 시작된 꿈


리옌훙은 1968년 중국 산시성 양취안의 공장 노동자 부부의 5남매 중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생 시절 그는 독서를 매우 좋아했다. 책을 읽기 위해 직원에게만 개방되는 공장 도서관을 아버지 출입증을 이용해 몰래 드나들 정도였다. 그는 “당시 도서관에서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없어 힘들었다”며 “이는 내가 검색엔진 개발에 나서게 된 배경 중 하나”라고 회상했다.


어렸을 적 리옌훙의 어머니는 “우리 집안은 평범하기 때문에 네가 성공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리옌훙은 베이징대에 진학해 정보관리학을 전공하는 동시에 컴퓨터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당시 습득한 정보관리학과 컴퓨터 지식은 향후 그가 검색 사이트 바이두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베이징대를 졸업한 리옌훙은 미국 유학길에 올라 뉴욕주립대 버팔로대학 컴퓨터학과 석사과정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여름방학을 맞은 리옌훙은 파나소닉 정보기술 연구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광학식문자판독기(OCR) 분야를 연구해온 그는 실습 기간 동안 식별효율을 높이는 알고리즘을 개발해 주목을 받았다. 실습이 끝날 무렵 파나소닉은 실습생을 정규직원으로 채용하지 않았던 관행을 깨고 그를 채용했다. 이후 리옌훙은 자신이 개발한 알고리즘에 관한 논문을 국제 학술지에 발표했다. 리옌훙의 지도교수는 국제적인 수준의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뛰어난 리옌훙이 박사학위를 따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하지만 실무 경험을 중시했던 그는 월스트리트의 스카우트 제의에 과감하게 박사 학위를 포기했다.


○3성 호텔방서 시작한 바이두


경제뉴스를 제공하는 다우존스에 입사한 리옌훙은 박사급 대접을 받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다우존스에서 그가 개발한 금융정보 검색 시스템은 아직까지 월가의 수많은 기업이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인포시크라는 유명 검색엔진 업체를 거치며 기술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창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99년 중국에도 인터넷 환경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그는 120만달러를 모아 중국으로 돌아가 창업에 뛰어든다. 당시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첫 사무실은 3성급 호텔의 객실이었다. 6개월의 밤낮없는 개발 끝에 중국 실정에 가장 적합한 검색엔진 바이두가 완성됐다. 바이두라는 이름은 송나라 시인 신치지의 시구에서 나왔다. ‘무리 속에서 그를 수백, 수천 번 찾았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등불 아래 그가 있더라’라는 시구 중 ‘수백번(百度)’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필요한 것을 찾는다는 검색엔진의 이미지를 잘 살린 이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다른 엔지니어들과 차별화됐던 것은 기술 개발보다 비즈니스 전쟁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던 시절 애독했던 월스트리트저널(WSJ)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신문을 통해 마이크로소프트가 어떻게 IBM에 대항하고 있는지,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등 비즈니스 전략을 읽을 수 있었다. 리옌훙은 뒷날 “기술은 결정적 요소가 아니며 비즈니스 전략을 어떻게 구사하는지가 승부를 결정하는 진정한 요소”라고 말했다. 


그의 비즈니스 감각이 유감 없이 드러난 것은 바이두의 미국 증시 상장이었다.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해외 자본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리옌훙은 바이두의 미국 나스닥 상장을 결정했다. 2005년 8월 개장가 66달러로 상장된 바이두의 주가는 당일 최고 151달러까지 오르며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렀다. 이후 바이두는 승승장구하며 성장해 2012년에는 매출 223억600만위안(약 3조9000억원)을 달성했으며 2013년에도 40~50%의 성장세를 보였다.


○수평적 리더십이 성공 비결 


“호랑이 없는 곳에 토끼가 왕노릇을 한다.” 일부 사람들은 바이두를 두고 이렇게 비아냥대기도 한다. 2010년 중국 정부와의 관계 악화로 세계 최대 검색엔진 구글이 철수하자 중국 시장은 바이두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바이두의 검색 점유율은 70%를 넘어서고 있다. 일각에서는 “구글이 중국에서 퇴출되지 않았다면 시장점유율 1위는 어림도 없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수많은 경쟁 업체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왜 유독 바이두가 크게 성공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리옌훙의 경영철학이 주된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 그는 직원들에게 ‘실패해도 좋으니 뭐든지 해보라’며 새로운 시도를 장려한다. 사실 바이두의 초기 검색엔진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데 리옌훙은 우선 부딪치고 보자는 생각으로 고객에게 서비스하기로 했다.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는 그때그때 해결해 나가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한 인터넷 시장에서 만약 기술적으로 완벽한 상태에서 시장에 진출하려고 했다면 시장 선점의 기회는 영영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이두의 지식 검색 서비스도 고객들의 피드백을 통해 끊임없이 개선해 현재에 이른 것이다. 리옌훙은 “바이두는 넘어지며 성장하는 어린이”라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리옌훙이 미국에서 공부해 민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회사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다른 중국 기업들이 수직적 의사전달 구조를 가지고 있는 데 비해 바이두는 수평적 의사소통 구조를 가진 회사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제품기획 회의에서 리옌훙이 외부 업체와 합작해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다수의 임원들이 반대해 그의 의견이 통과되지 못한 적도 있다. 리옌훙이 말하는 중간에도 누구든 이견을 제시하거나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상하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는 민주적인 의사소통 구조는 직원들의 사고를 유연하게 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촉진해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 동종업계의 평가다. 


박병종 기자 ddak@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2014. 1. 10]

설정

트랙백

댓글

'식물로 만든 달걀' 세계 갑부들이 반했다

스타트업 2014. 3. 26. 10:51


‘땅에서 자라는 달걀’에 세계 최고 부호들의 돈이 몰리고 있다. 식물성 단백질로 만든 달걀 대체재 산업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서다.


실리콘밸리의 벤처 식품기업 햄튼크릭푸드는 17일(현지시간) 리카싱 홍콩 청쿵그룹 회장이 이끄는 벤처캐피털 호라이즌벤처스 등으로부터 2300만달러의 투자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310억달러(약 33조원) 자산가로 아시아 최고 부자인 리카싱 회장은 이전에도 페이스북 스카이프 등에 초기 투자해 상당한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이 밖에 세계 최대 부자인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MS) 기술고문, 피터 시엘 페이팔 공동설립자, 제리 양 야후 공동설립자, 비노드 코슬라 썬마이크로시스템즈 공동설립자 등 쟁쟁한 사업가들이 햄튼크릭푸드 투자에 참여했다.


햄튼크릭푸드는 2011년 조시 테트릭 최고경영자(CEO)가 설립한 식품기업으로, 황두 등 식물성 원료로 만든 인조 달걀 ‘비욘드에그(beyond eggs·사진)’로 주목받고 있다. 비욘드에그는 콜레스테롤이 포함돼 있지 않고 조류인플루엔자(AI)나 살모넬라 등 감염성 질병 걱정도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달걀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과 채식주의자 사이에서 환영받고 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닭장에서 비인도적으로 닭을 사육할 필요도 없다. 맛은 달걀과 같거나 오히려 나은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적 과학기술잡지 파퓰러사이언스가 지난해 이 업체에 혁신대상을 준 이유다.


투자자들이 비욘드에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런 장점뿐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생산비가 기존 달걀 대비 48% 저렴해 경제성을 갖췄기 때문이다. 빵이나 쿠키 마요네즈 등 가공식품 원료로 사용할 경우 상품 가격은 낮추면서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상품을 만들 수 있다. 몇몇 식품 제조업체에 비욘드에그를 공급하던 햄튼크릭푸드는 최근 대형 유기농 식품 유통업체 홀푸드마켓과 계약을 맺고 인조 달걀 마요네즈 ‘저스트마요’를 납품하며 미국·영국 소매시장에도 진출했다.


문제는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필요한 설비 투자 비용이었다. 투자자를 물색하던 테트릭 CEO는 우연한 기회에 리카싱 회장을 만나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리카싱을 찾아간 테트릭은 비욘드에그의 장점을 역설한 끝에 1550만달러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비노드 코슬라와 제리 양으로부터 추가 투자를 받아 총 2300만달러를 확보했다. 테트릭 CEO는 “이 돈으로 생산 설비를 확충하고 연구개발(R&D)에 힘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햄튼크릭푸드에 있어 리카싱의 투자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중국 진출의 교두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세계 달걀 생산량의 38%를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다. 테트릭 CEO는 “중국 각지에서 AI가 발생해 달걀의 위험성이 높아진 지금이 중국 진출의 적기”라고 강조했다. 중국 농부들과의 상생 가능성도 열어뒀다. 그는 “황두 등 인조 달걀 제조에 필요한 작물을 재배할 경우 이를 구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병종 기자 ddak@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2014. 2. 18]

설정

트랙백

댓글

아리아나 허핑턴 '허핑턴포스트' 회장, 대통령·영화감독 등 5만명 필진…댓글 토론으로 충성독자 확보

한국경제 2014. 3. 26. 10:47


‘이카로스 이후 가장 높이 올라간 그리스인.’

2011년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허핑턴포스트의 설립자이자 현직 회장인 아리아나 허핑턴을 그리스 신화 속 인물에 빗대 이렇게 묘사했다. 미국 대형 온라인 포털 AOL이 창간 6년밖에 안된 허핑턴포스트를 3억1500만달러에 인수하면서 허핑턴이 얻게 된 평가다. 허핑턴포스트는 일찌감치 워싱턴포스트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의 온라인 트래픽을 따라잡고 2011년에는 뉴욕타임스도 추월하며 세계에서 방문자 수가 가장 많은 인터넷 신문이 됐다. 결국 그해 허핑턴은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들었고 지난해에는 포브스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우먼 20인’에 선정됐다.

○콤플렉스 극복한 그리스 소녀

허핑턴은 1950년 7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나치 점령 하에서 레지스탕스 신문을 펴낸 언론인으로 이후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다. 허핑턴은 아버지를 따랐지만 그의 어머니는 전쟁 때문에 염세적으로 변해버린 아버지의 성격 탓에 허핑턴이 9세 때 이혼한다. 이후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그는 16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 거튼칼리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어린 시절 그는 몇 가지 태생적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사춘기 시절에는 177㎝까지 커버린 큰 키에 절대 남자친구를 사귀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케임브리지대 유학 시절엔 억센 그리스 억양 때문에 외계인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외국인 최초로 케임브리지대 학생회장을 맡게 된다. 경영학 석사로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한 21세의 허핑턴은 21세 연상의 ‘더 타임스’ 칼럼니스트 버나드 레빈을 만나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레빈은 허핑턴이 작가이자 지성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지적 토양을 제공했다.

레빈을 만나 세상에 눈을 뜬 허핑턴은 23세 때 여성 해방운동을 주장한 저매니 그리어의 저서 ‘여성적 내시’에 반박하기 위해 ‘여성적 여자’라는 책을 쓰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7년간의 동거 생활에도 레빈이 결혼을 원치 않자 30세가 된 허핑턴은 1980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허핑턴은 저술가로 활동하다 1985년 석유재벌이자 공화당 정치인이던 마이클 허핑턴을 만나 이듬해 결혼하며 현재의 허핑턴이란 성을 쓰게 된다. 마이클은 1994년 상원의원에 당선됐으나 둘의 가정생활은 이후 3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허핑턴은 결별 이유에 대해 “마이클은 유럽에서 요트를 타며 노후를 즐기고 싶어했지만 나는 내 인생을 더 발전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터넷판 ‘아고라’ 허핑턴포스트

마이클을 통해 미국 정계에 두터운 인맥을 쌓고 이혼으로 거액의 위자료를 받은 허핑턴은 2003년 무소속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도전했다가 영화배우 출신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높은 벽에 부딪혀 선거 전날 기권한다. 실패를 딛고 그가 선택한 것은 인터넷 신문. 선거운동을 치르면서 온라인의 영향력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2005년 그의 나이 55세에 자본금 100만달러(약 11억원)로 허핑턴포스트를 설립했다. 초창기 허핑턴포스트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르윈스키 스캔들을 폭로했던 최초의 미디어 블로그 ‘드러지리포트’를 베꼈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랬던 허핑턴포스트는 허핑턴의 폭넓은 인맥과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월터 크롱카이트 등 당대 쟁쟁한 논객들이 돈 한푼 받지 않고 블로그에 글을 쓰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허핑턴의 능력이었다. 이후 오바마 미국 대통령, 노엄 촘스키 MIT 교수,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리처드 도킨스 옥스퍼드대 교수,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 등 쟁쟁한 명사들이 허핑턴포스트에 무료로 글을 썼고 수많은 독자를 끌어들였다.

허핑턴포스트는 기자들이 직접 취재하기보다는 5만명에 달하는 블로거의 글에 의존하고, 다른 매체가 보도한 기사를 적절히 가공해 보도한다. 그러다 보니 경쟁자들로부터 독립적인 매체라기보단 ‘기생충’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자신들의 기사를 베꼈지만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SNS)에 퍼뜨리는 등 마케팅은 더 잘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저널리즘적 관점에서 보면 700여명의 기자들은 대부분 비전문 인력이지만 인터넷 환경에 최적화돼 있다. 다른 매체 기자들이 기사를 송고하고 나면 일이 끝나는 반면 허핑턴포스트 기자들은 SNS에서 독자가 기사를 읽을 때까지 5분마다 한 번씩 제목의 토씨를 바꿔 가며 밤새 재발신한다.

허핑턴은 허핑턴포스트의 성공 배경에 대해 그가 그리스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일반 시민들이 모여 정치와 사회, 예술 등을 토론하며 여론을 형성했던 ‘아고라(광장)’를 온라인에 옮겨 놓은 것이 허핑턴포스트라는 것이다. 허핑턴은 사람들이 기사를 읽을 뿐만 아니라 기사 내용에 대해 다른 독자와 얘기하고 싶어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소셜 뉴스’라는 코너를 통해 댓글을 매개로 친구를 모으고, 기존 SNS의 친구를 끌어와 토론할 수 있게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댓글 활성화로 독자가 늘면서 자연스레 악성 댓글도 늘어났는데 전문 댓글 관리자와 댓글 순화 프로그램을 통해 해결해 왔다. 하지만 악성 댓글이 너무 많아져 기존의 방법으로 감당할 수 없어지자 지난해 댓글 실명화를 선언했다.

‘그래도 나는 내 길 간다’

미국 언론계에서 허핑턴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개방적이고 지성미를 갖췄으며 매혹적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그에 대한 비판 여론도 적지 않다. ‘변절’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정치적 신념과 원칙을 바꿔왔기 때문이다. 허핑턴은 남편이 공화당원이었던 만큼 열렬한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다 1996년 알 프랭켄 민주당 의원과 함께 미국 코미디 방송국인 ‘코미디 센트럴’의 정치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민주당 지지로 전향했다.

여성주의적 신념도 바꿨다. 그의 첫 저서 ‘여성적 여자’에서는 여성주의자들을 비판했으면서도 ‘피카소: 창조자이자 파괴자’란 저서에서는 피카소를 여성 혐오주의자로 묘사하며 페미니즘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워싱턴포스트의 다나 밀뱅크는 “허핑턴은 다음에 유행할 아이디어를 무작정 좇는 방식으로 성공한 기업가이자 작가”라고 평했다. 그의 성공은 만나왔던 남자들의 후광 때문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버나드 레빈을 통해 지적 토양을 얻었고 전 남편이었던 마이클 허핑턴을 통해 재력과 폭넓은 정계 인맥을 얻었다. 이후 AOL의 임원이었던 케네스 레러를 만났는데 허핑턴포스트에 대한 아이디어는 레러와의 대화에서 나왔으며 초기 투자금 100만달러 가운데 상당 부분을 레러가 투자했다. 레러는 허핑턴포스트의 첫 최고경영자(CEO)였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도 그녀의 능력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탁월한 사교술 덕분에 그는 넓은 인맥과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수많은 비판에도 그는 “다른 사람의 비판에 내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며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박병종 기자 ddak@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2014. 2. 28]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