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파스키에 주한 프랑스 대사 "마더·설국열차…봉준호 감독 영화 안본게 없어요"

한국경제 2014. 3. 26. 10:42


“영화 ‘마더’(봉준호 감독)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한국 특유의 강렬한 표현 방식으로 인간의 감정을 깊이 있게 그려냈습니다. 봉 감독의 최근 인기작 ‘설국열차’보다 제가 마더를 더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이태원의 프랑스 음식점 ‘르꽁뜨와’에서 만난 제롬 파스키에 주한 프랑스 대사는 한국 영화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실미도’, 봉 감독의 대표작 ‘괴물’, 최근 비행기에서 봤다는 ‘7번 방의 선물’까지….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들이 그의 입에서 술술 나왔다. 심지어 한국 사람에게도 생소한 베니스 영화제 초청작 ‘무게’와 칸 영화제에서 단편부문 황금종려상을 받은 ‘세이프’ 등에 대한 칭찬도 곁들였다. 그가 ‘무게’에 대해 “제목에서 오는 느낌처럼 무거운 이야기를 비극과 희극을 오가며 절묘하게 조율했다”는 평가를 할 때는 영화평론가로 착각할 정도였다.


○문화강국 비결은 정체성 확보


한·불 문화 교류에 관심이 많은 그가 지난달 20일 프랑스 음식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며 찾은 곳은 르꽁뜨와였다. 다른 유명 프랑스 레스토랑도 많은데 굳이 이곳을 택한 이유에 대해 파스키에 대사는 “일반적으로 ‘프랑스 요리’라고 하면 비싸고 고급스러운 정찬만을 떠올리는데 이곳은 소담하고 친근해 프랑스 요리의 새로운 면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한국인 셰프가 운영하는 만큼 한·불 문화 교류의 상징”이라는 의미도 더했다.


파스키에 대사는 프랑스 음식점을 고르긴 했지만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1988년부터 5년간 주한 프랑스대사관 문화 참사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2012년 대사로 다시 부임했다. 프랑스에 돌아간 뒤 ‘삼계탕’의 맛이 너무 그리웠다고 했다.


르꽁뜨와의 점심은 주방장이 정한 코스대로 매일 메뉴가 바뀐다. 빵이 나오기 전 레드 와인으로 잔을 채웠다. 와인의 이름은 코트뒤론. 한국 사람에게도 익숙한 보르도와 보르고뉴 사이에 있는 원산지의 이름을 땄다. 텁텁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달지도 않은 향이 혀끝을 맴돌았다. 파스키에 대사는 “한국에 지역별로 특산 김치가 있듯 프랑스는 지역마다 독특한 와인이 있다”고 소개했다. 프랑스 관광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7~8%를 차지할 정도로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갓 구운 빵 소쿠리가 테이블에 놓였다. 고소한 냄새가 코로 전해졌다. 파스키에 대사는 관광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여러 지방이 각자 독특한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리에 가서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여행의 목적은 그 지역의 특수한 문화를 느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는 바스크, 프로방스 등 각 지방이 저마다 다양한 분위기를 품고 있어 어느 곳이나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채 요리로 정갈한 접시에 샐러드가 곁들여진 ‘테린 캄파뉴’가 올라왔다. 테린은 돼지 간을 각종 채소와 함께 오븐에서 중탕으로 익힌 프랑스의 대중적인 음식이다. 이야기는 프랑스에 불고 있는 한류로 흘렀다. 파스키에 대사는 “프랑스 젊은이들 사이에서 K팝, 영화, 드라마 등 한류 바람이 거세다”고 전했다. 지난해 11월 한·불 정상회담으로 프랑스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 드라마를 사랑하는 프랑스인 모임’을 찾았을 정도다. 파스키에 대사 자신도 “2010년 방영한 드라마 ‘장난스런 키스’를 재밌게 봤다”며 “개인적으로 판소리도 좋아한다”고 귀띔했다.


일자리 위해 갈아탄 정책 노선


메인 요리로 ‘커리 소스로 쪄낸 홍합’이 한가득 보울에 담겨 나왔다. 포크로 홍합을 까던 파스키에 대사에게 프랑스 경제에 관해 물었다. 그는 “지난해 성장률을 보면 확실히 경기 후퇴에서는 벗어나 회복되고 있다”며 “작년 4분기 성장률은 0.3%로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독일의 0.4%와 큰 차이가 없다”고 강조했다.


최근 기업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기로 한 것이 경제정책 방향의 근본적 변화인지 궁금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취임 초기 부유세 추진 등 각종 포퓰리즘적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파스키에 대사는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일자리 부족”이라며 “올랑드 정부는 기업 지원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기업의 사회보장 부담금을 줄여주고, 프랑스에 투자하는 해외 기업에 각종 인센티브를 주는 것도 이 같은 정책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지난달 18일 올랑드 대통령은 삼성전자, 인텔, GE 경영진 등 30명의 기업인을 엘리제궁으로 초대했다.


최근 중국 둥펑자동차가 프랑스의 대표적 자동차 기업 푸조를 인수한 데 대해서는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했다. 그는 “푸조는 가족 경영 구조로 규모가 작아 자동차산업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었다”며 “이번 지분 인수를 통해 규모도 키우고 급성장하는 중국 자동차 시장도 노릴 수 있어 오히려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는 유럽의 심장에 위치해 교통이 좋고 프랑스의 6500만 인구는 물론 유럽 전역을 시장으로 삼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초과학을 기반으로 한 우수한 노동력, 뛰어난 교통·에너지 인프라, 높은 문화 수준 등 다른 이점도 열거했다. 


타협의 톨레랑스


파이의 일종인 사과 타르트가 디저트로 나왔다. 입 안에 남은 커리 향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조금 민감한 사안으로 화제를 돌렸다. 올랑드 대통령의 스캔들에 대해 물었다. 지난 1월 프랑스 잡지 클로저는 올랑드 대통령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배우 쥘리 가예와 밀애를 나눠왔다고 폭로했다. 그 ‘바람’에 동거녀인 트리에르바일레는 몸져 누웠으며 끝내 결별했다. 파스키에 대사는 담담하게 답했다. 타르트를 입에 넣은 채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대통령의 사생활에 개의치 않는다”며 “프랑스 국민이 대통령에게 원하는 것은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정책을 펴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어 “시라크, 미테랑, 사르코지 등 전임 대통령도 비슷한 전력이 있다. 오히려 대통령도 평범한 남자라는 것을 보여줘 대중적인 지지도는 올라갈 수도 있다”며 웃었다. 실제로 지난 1월 외도를 공식 인정한 이후 올랑드 대통령의 지지율은 깜짝 상승했다.


올랑드 대통령의 예에서도 엿볼 수 있듯 프랑스는 톨레랑스(tolerance)의 나라다. 톨레랑스는 ‘타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파스키에 대사는 “프랑스인의 이런 면모를 사회적 타협의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프랑스 정부가 노조와 수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연금 개혁의 틀’을 세웠다”며 “개혁에 앞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퇴직자는 늘고 경제활동인구는 줄어 연금 개혁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이해당사자들이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고 한발짝씩 양보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연금 개혁의 핵심 내용은 법정 퇴직 연령을 현행 62세로 유지하는 대신 연금을 받기 위한 기여금 납부 기간을 늘리는 것이다.


얼 그레이, 에스프레소 등 각자의 찻잔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임기 중 가장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물었다. 그는 “남은 임기에 한국 기업의 대규모 투자를 프랑스에 유치하고 싶다”며 “2015~2016년 ‘한·불 상호교류의 해’를 통해 양국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불 비즈니스와 문화의 가교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박병종 기자 ddak@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2014. 3. 6]




파스키에 대사의 단골집,르꽁뜨와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2에 있는 르꽁뜨와는 한국인 셰프가 운영하는 정통 프랑스 음식점이다. 파란색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이태원역과 가까워 접근성도 좋다.


이 가게의 셰프 서문용욱 씨(37)는 프랑스 리옹의 유명 요리학교 ‘엥스티튀 폴 보퀴즈’에서 요리를 배우고 파리 미슐랭 가이드 선정 3스타 레스토랑인 ‘르도옌’을 거쳐 파리 ‘라시에스트’에서 헤드셰프로 일했다. 휴가차 한국에 왔다가 때마침 이태원에 좋은 자리가 난 것을 놓치지 않고 르꽁뜨와를 열었다. 한국의 많은 프랑스 레스토랑이 한국화된 프랑스 음식을 선보이지만 서씨는 ‘기본이 흔들리면 이도 저도 아닌 정체불명의 요리가 될 것’이라며 프랑스 정통 레시피를 고집한다. 한국에 사는 프랑스인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이유다.


인기 있는 메뉴는 르꽁뜨와 샐러드, 양갈비구이, 자연산 대구요리, 부드러운 소 뽈살찜 등이다. 메인요리는 3만~4만원, 애피타이저는 1만4000~2만4000원, 디저트는 1만원 안팎이다. 평일 점심에 가면 그날 셰프가 정한 ‘점심 특선 코스’를 맛볼 수 있다.가격은 1만9000원. (02)792-8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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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커의 경고…"유출된 정보로 당신 은행계좌 다 털 수 있다"

한국경제 2014. 3. 26. 10:35

“지금까지 털린 개인정보로 거의 모든 범죄가 가능해졌어요. 빠져나간 개인정보를 악용할 수 있는 사례가 어찌나 많은지 시나리오 공모전을 열어도 될 정도예요.”


대한민국이 금융범죄에 벌거벗겨졌다. 지난 1월 KB국민·NH농협·롯데 등 카드 3사에서 1억400만건의 고객정보 유출이 드러난 데 이어 지난 6일에는 KT 홈페이지 해킹으로 1200만건(981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잇따라 새나간 개인정보가 이미 시중에 범람하며 각종 범죄에 이용되고 있다는 해커들의 증언이 나오고 있다. 


개인의 사생활을 뒷조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본인을 사칭한 금융사기도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한국경제신문이 17일 인터뷰한 익명의 해커 A씨는 “과거에도 개인정보 유출이 있었지만 카드사와 KT 사태 이후로 광범위한 정보가 풀려 개인정보를 얻는 게 너무 쉬워졌다”며 “1인당 100원이던 4대 개인정보(이름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이메일주소)를 이제는 1~5원에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정보 유출이 국가비상사태급이지만 정부와 국민이 심각성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며 “정부는 책임회피, 사태축소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진상을 있는 그대로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 해커는 현재 시중에 돌아다니는 개인정보를 갖고 저지를 수 있는 범죄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했다.


(1) 대포폰 통해 소액결제


금융회사 등에서 유출된 개인정보 중 가장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는 ‘이메일’이다. 이메일 주소를 확보하면 비밀번호는 다양한 방식으로 알아낼 수 있다. 다른 경로로 유출된 정보에서 비밀번호를 얻거나 비밀번호 대입 프로그램을 이용해 알아낼 수도 있다.


비밀번호를 알아내 일단 이메일 계정에 접속하면 얻을 수 있는 개인정보의 폭은 확 넓어진다. 많은 사람이 민감한 개인정보를 메일함에 무심코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권과 주민등록증 등 신분증 사본이다. 해외여행이나 출장을 다녀오면서 여행사나 회사 서무팀에 보낸 스캔 파일이 보낸편지함 등에 그대로 저장돼 있는 사례가 많다.


개인정보를 악용하기로 마음먹은 해커들은 ‘여권’ ‘주민’ 등의 키워드 검색을 통해 이 같은 고급 정보부터 확인한다. 신분증 사본이 있으면 온라인 휴대폰 판매사이트에서 피해자 명의의 대포폰을 개통할 수 있다. 이 대포폰을 소액결제에 활용하면 월 최대 30만원까지 결제가 가능하다. 이후 대포폰은 다양한 사칭 사기에서 본인인증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2) 불법 계좌이체·인출 


이메일 계정에는 인터넷 뱅킹 보안카드 사진파일이 저장돼 있는 경우도 많다. 적지 않은 인터넷 뱅킹 이용자들은 스마트폰에 보안카드를 사진으로 저장해 이용한다. 그 경우 스마트폰 데이터를 메일로 백업하면 보안카드 사진이 메일 계정에도 남는다.


유출된 개인정보에 추가로 보안카드까지 확보하면 공인인증서를 다시 발급할 수 있다. 재발급받은 공인인증서를 통해 피해자의 계좌에 있는 돈을 대포통장으로 이체할 수 있다.


이체한 돈을 현금화하기 위해서는 위조 주민등록증이 필요하다. 유출된 성명과 주민등록번호 정보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위조 주민등록증은 중국 출신의 브로커들이 약 3만원에 판매한다. 은행마다 대포 통장을 만들어 피해자의 돈을 각각 이체한 뒤, 조선족 등 외국인들로 구성된 인출조로 한꺼번에 돈을 인출한다. 순식간에 자기 통장에서 거액의 돈이 빠져나갈 수 있다.


(3) 신용정보 조작·사생활 공개 


유출된 개인정보가 금전 사기가 아니더라도 신용정보 조작이나 사생활 공개에 악용되면 치명적이다. 실제로 이번 유출 사태 이후 “입찰에서 떨어뜨리고 싶은 경쟁사가 있으니 해당 법인과 대표이사의 신용도를 불량으로 만들어 달라”는 청부해킹 의뢰가 들어오기도 했다고 A씨는 밝혔다. 제시된 대가는 2억원이었다. 유출된 개인정보를 이용해 신용대출 서류를 꾸미면 거액의 대출 사기를 벌일 수도 있다. 


과거의 애인이었던 연예인의 개인정보를 이용해 “다른 남자 연예인과 사귀는 동안 찍었던 사진을 유포해 달라”는 요청도 들어왔다고 한다. 두 건 모두 의뢰에 응하지는 않았다고 A씨는 말했다.


박병종/김보영 기자 ddak@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2014. 3. 17]



해커가 조언하는 긴급처방 5가지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늘면서 금융사고 등 2차 피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금융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해커 A씨가 조언한 긴급 처방 다섯 가지를 추렸다.


#1. PC와 이메일, 클라우드 서비스 등에 저장된 개인정보부터 삭제하라.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무심코 여행사에 여권 사본을 보냈다면 금융범죄의 타깃이 되기 쉽다. 특히 휴대폰에 인터넷 뱅킹용 보안카드를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고 있다면 즉시 삭제하라. 만약 이런 정보가 해킹되면 개인 과실로 간주돼 피해를 구제받기 힘들다.


#2. 신용카드와 은행 통장을 폐기하고 재발급받아라. 이미 당신의 신용카드 번호와 은행 계좌번호 등은 유출됐다고 봐야 한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 조치다.


#3. 공인인증서를 USB메모리 등 휴대저장장치에 보관하라. PC나 인터넷상에 보관할 경우 해커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 특히 공인인증서 재발급이나 계좌 이체시 이용 내역을 바로 알려주는 문자(SMS) 통지 서비스에 가입해야 한다. 


#4. 인터넷 뱅킹 사이트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즉시 바꾸고 다변화하라. 적어도 금융 서비스만큼은 다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사용하는 게 안전하다.


#5. 인터넷뱅킹 이용시 일회용 비밀번호 생성기(OTP)를 사용하라. OTP는 네 자리 숫자 35개가 쓰여 있는 보안카드와 달리 일회용 비밀번호를 1분마다 새로 만들어주는 안전한 보안매체다.


박병종 기자 dda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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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스마트폰, 슈퍼컴 된다

IT이야기 2014. 3. 25. 22:03

직장인 조준하 씨(28)는 잠들기 전에 스마트폰의 ‘파워슬립(power sleep)’ 애플리케이션(앱·응용프로그램)을 켜둔다. 조씨가 자는 동안 스마트폰 중앙처리장치(CPU)의 연산 능력은 인터넷을 타고 토마스 라타이 오스트리아 빈대 생명정보학부 교수 연구팀의 클라우드 슈퍼컴퓨터를 가동하는 데 쓰인다. 이 컴퓨터는 암, 알츠하이머 질환과 관련한 단백질 구조를 분석해 치료제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이 앱은 삼성전자가 개발한 그리드 컴퓨팅(grid computing) 앱이다. 


클라우드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리드 컴퓨팅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그리드 컴퓨팅은 인터넷에 연결된 다양한 컴퓨터의 유휴 연산 능력을 하나로 통합해 가상 슈퍼컴퓨터를 구성하는 기술이다. 1990년대 중반 미국 시카고대 교수인 이안 포스터와 칼 키셀만의 이론에서 유래했다.


그리드 컴퓨팅이 본격 시작된 것은 RC5 암호기술로 유명한 보안기업 RSA시큐리티가 “암호문을 해독하는 사람에게 1만달러의 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공언하면서다. 이에 모든 가능한 경우의 수를 하나씩 넣어 보는 무차별 대입 방식으로 암호를 풀자는 공감대가 인터넷상에서 형성됐고 1997년 디스트리뷰티드넷이라는 그리드 컴퓨팅 프로젝트가 출범했다. 수만명의 네티즌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첫 번째 암호가 그해 풀렸다. 암호문은 “이제 더 긴 암호문에 도전할 때”였다. 이후 2007년 두 번째 암호가 풀렸고 현재는 세 번째 암호 해독이 시도되고 있다. 


이후 그리드 컴퓨팅은 주로 과학 연구 분야에서 많이 사용됐다. 2013년 ‘힉스 입자’를 발견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역시 그리드 컴퓨팅의 도움을 받았다. 힉스 입자는 우주에 있는 모든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고 사라진 물질로 세계 물리학계는 수십년 동안 그 존재 규명에 매달렸다. 세계 34개 국가에서 20만대의 컴퓨터를 연구작업에 동원한 결과 결국 그 존재를 입증했다. 심지어 외계인을 찾는 데도 그리드 컴퓨팅이 이용된다. 1999년 시작된 세티(SETI@home) 프로젝트는 참여자 컴퓨터에서 화면보호기가 작동되는 동안 푸에르토리코 전산소로부터 외계 전파 자료를 받아 분석하고 분석자료를 재전송한다. IBM도 ‘월드커뮤니티그리드’로 고영양쌀·청정에너지 개발 프로젝트 등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드 컴퓨팅 기술은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의 생태계 구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진화 한국비트코인거래소(Korbit) 이사는 “비트코인은 거래시 시스템이 자체적으로 화폐의 위조 여부를 검증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리드 컴퓨팅 기술이 이용된다”며 “검증 과정에 참여한 컴퓨터는 보상으로 비트코인을 받는데 이를 ‘채굴’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그리드 컴퓨팅에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CPU의 연산 능력을 훔쳐 사익을 추구하는 악성 프로그램도 넘쳐나고 있다. 최근 다른 사람의 컴퓨터를 감염시켜 비트코인 채굴에 동원하는 악성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디도스(분산서비스 거부) 공격 역시 불특정 다수의 컴퓨터 연산 능력을 훔쳐 동시에 특정 컴퓨터를 공격하는 방식이다. 


일부 국내 웹하드 업체는 자신의 서버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객의 컴퓨터를 일종의 서버로 이용하는 프로그램을 강제 설치하기도 한다. 다른 웹하드 이용자가 같은 파일을 찾으면 웹하드 서버 대신 이용자 PC를 통해 파일을 전송해주는 방식이다. 이 경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컴퓨터가 느려지며 먹통이 되기도 한다. 인터넷 포털 업체들도 그리드 컴퓨팅을 이용한 적이 있다. 다음은 동영상 서비스 ‘티비팟’에, 네이버는 웹툰 서비스에 적용했다가 사용자들의 불만으로 기술 적용을 중단했다.


■ 그리드 컴퓨팅


인터넷으로 연결된 수많은 컴퓨팅 기기의 유휴 연산 능력을 묶어 가상의 슈퍼컴퓨터를 구성하는 기술.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가 평균적으로 50% 미만의 연산 능력만 사용한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모인 연산 능력은 암 에이즈 등의 질병 치료제 연구나 DNA 분석 등에 이용된다.


박병종 기자 ddak@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2014. 3.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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