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중임제 개헌

논술작문 2012. 8. 18. 18:25

대통령 못 해먹겠다.” 노무현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한 말이다. 전체 유권자의 30.5% 득표로 당선된 정권의 낮은 신임도는 이 같은 대통령 스스로 권위를 떨어뜨리는 언행 때문에 더 낮아졌다. 그 이면에는 국회의 여소야대 상황에 따라 정부정책이 전면적으로 무력화 된 상황이 있었다. 정부정책이 표류하면서 대통령의 지지도는 떨어졌고 답답한 마음에 내뱉은 말들은 기존에 대통령이 갖던 카리스마적 권위를 상실시켰다. 이후 이어진 탄핵정국은 탈권위주의를 기치로 삼은 참여정부에 혼란을 가중시켰고 불신임정국을 일상화시켰다. 이러한 문제를 몸소 체험한 노 대통령은 개헌을 통해 4년 중임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는 현 대통령제에 대한 회의가 담겨 있다. 87년 체제가 장기독재를 막기 위해 마련한 5년 단임제는 4년 임기의 국회의원 선거와 함께 엇갈리면서 끊임없이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어 왔다. 이런 현상은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권력분립과 견제를 실현한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미국처럼 여야 간 활발한 정책협조 분위기가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 첨예한 대립은 국정마비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성숙한 타협문화가 없는 현재 한국정치를 고려했을 때 이는 득보다 실이 큰 제도이다. 이러한 이유로 4년 중임제 시행과 대선-총선 시기를 맞춰 국정운영의 효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요구된다. 동시에 정부와 여권의 독선을 막기 위한 상설 견제장치 마련이 필요하다. 항상 보장되는 것도 아닌 여소야대 정국을 통해 정부를 견제한다는 것은 항시적으로 필요한 권력 견제의 공백을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대선, 총선의 시행시기가 다른 현재의 선거제도는 국정운영의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결점도 있다. 혹자는 대통령 임기 중 시행되는 총선이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가 되기에 긍정적 견제수단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소야대 국회에 의해 파행하는 국정운영의 책임을 물어 총선에서 대통령당을 심판하는 것도 정치적 책임소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국회의 독립성을 훼손한다. 4년 단임제와 양대 선거 시기를 맞추는 방안은 정부와 국회 간의 분할정부 출현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낮춤으로써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5년 단임제의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5년 임기보장은 무능하고 독선적인 대통령을 둔 국민들에겐 너무 긴 시간이다. 심판이나 재신임 기회가 없기 때문에 단발성 정책집행이나 조직적 부패 등의 무책임한 국정운영이 초래될 수 있다. 또 집권기회가 한번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여당의 차기 대선주자에 의해 조기 레임덕 현상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임기 내에 치적을 남기려는 대통령과 집권당의 정권재창출 노력이 서로 다른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4년 중임제는 4년 임기 후 중간평가가 가능하기에 정부의 책임감을 높이고 여론수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게 만든다. 또 재선의 가능성은 초선 4년의 레임덕 가능성을 차단하고 재선 2년 정도까지는 권력누수현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5년 단임제에 비해 상대적 우위를 갖는다.

 

군사독재 시대는 막을 내렸고 민주정치가 과거로 회귀할 가능성은 없기에 굳이 단임제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불신임 정국 일상화를 타개하기 위해 과거 3김과 같은 카리스마적 인물의 등장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문제해결을 위해선 상대 당을 진정한 협상의 대상으로 여기는 성숙한 정치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문제는 이런 문화가 정착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사회가 당면한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라도 4년 중임제 개헌의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

 

'논술작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제적 약자를 위한 시장개입은 정당한가  (0) 2012.08.25
잊혀질 권리  (0) 2012.08.21
죽음이 사라진 사회  (0) 2012.08.14
죽음 - One of sleeping style  (0) 2012.08.14
공기업 민영화  (0) 2012.08.11

설정

트랙백

댓글

죽음이 사라진 사회

논술작문 2012. 8. 14. 15:10

몇 달 전 인간이 지구 상에서 갑자기 사라졌을 때를 가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인간이 사라진 후 가장 먼저 멸종할 동물은 바로 애완견이었다. 야생에서 사냥해 본 적이 없는 애완견들은 굶주림 속에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거추장스럽게 길쭉한 몸, 그 몸에 비해 지나치게 짧은 다리 등 자연스럽지 않게 개량된 신체는 그들이 사냥은 고사하고 포식자로부터 도망가는 것조차 힘들게 만든다. 결국 자연스러움으로부터 괴리된 존재는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인간도 이 명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진데, 우려되는 것은 죽음과 괴리된 인간의 부자연스러운 삶이다.


사람들은 생명과 삶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 생명이란 생명체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에서 죽음은 배제하려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문명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삶에서 죽음을 격리시키려 노력해 왔다. 도축장을 따로 만들어 은밀히 죽음을 생산한다. 전쟁에선 칼이 살을 파고드는 생생한 죽음의 감촉을 피하기 위해 멀리서 총을 쏘더니 이제는 전투기와 미사일로 죽음의 광경을 회피한다. 심지어 병원이나 장례식장 또한 일상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죽음의 현장을 일상에서 분리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죽음을 일상적으로 보고 느끼던 사람들은 이제 죽음에 대한 면역성을 잃어버린 채 무균돼지로 가축화 한다.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 첫째로 일상에서 자연스레 얻을 수 있었던 죽음에 대한 면역력이 이젠 없기 때문에 갑작스런 죽음의 현장이 눈 앞에서 벌어졌을 때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 갑작스런 사고나 재난으로부터 인간이 겪게 되는 정신적 고통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구조 현장에 있던 많은 구조원들이 현재까지도 그 때의 참상 때문에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한다. 만약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상적으로 사냥을 통해 죽음과 대면했던 인디언들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그 정도로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렸을까.


둘째론 죽음으로부터 분리된 삶이 우리를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도축장에서 이뤄지는 죽음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하루에도 수 마리의 닭을 소비한다. 이러한 무감각은 죽음을 과잉생산 하는 결과를 만든다. 미사일 등의 첨단무기는 전쟁으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은폐함으로써 국민들이 전쟁을 쉽게 용인하도록 만든다. 죽음을 회피하려는 현대인의 노력이 역설적이게도 훨씬 더 많은 죽음을 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이 일상에서 사라지면 좋기만 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부작용들이 출현하고 있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됐다 하여 면역력을 기르기 위해 체험학습을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시 피가 낭자하던 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다. 문제는 그래서 더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근대성이란 야생성을 버리고 양처럼 순화되는 것이었다. 인간이 양이 되서 걱정스러운 이유는 언제 무서운 사자가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논술작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잊혀질 권리  (0) 2012.08.21
4년 중임제 개헌  (0) 2012.08.18
죽음 - One of sleeping style  (0) 2012.08.14
공기업 민영화  (0) 2012.08.11
힐링  (0) 2012.08.06

설정

트랙백

댓글

죽음 - One of sleeping style

논술작문 2012. 8. 14. 12:42

고등학교 시절 하루는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고 너무 피곤해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잠든 적이 있다. 나중에 잠에서 깨어보니 이미 3시간이 흘러 집에 갈 시간이 되어 있었다. 반 친구들이 과학실습 하러 실험실에 가는 중에 내가 빠진 것을 몰랐단다. 너무나 곤한 잠이었기에 몸은 가뿐했지만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영원히 잠들었다면 어땠을까. 죽음이 잠깐 동안 나를 방문했다 돌아간 느낌이었다. 3시간이 아니라 30년을 잔다면 그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삶과 죽음의 구분이 잠든 시간의 길이에 달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삶과 죽음은 명확히 나누어 생각하지만 삶과 잠은 구분하지 않는다그러나 잠자고 있는 상태의 의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라는 단어에서 받는 느낌과 다르다. 그것은 잠이 감각의 세계에서 벗어난 죽음의 상태와 가까워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잠이란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어쩌면 잠이 죽음의 예행연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닿는다. 여기서 혹자는 잠은 다시 깨어날 수 있는 임시적인 상태이고 죽음은 다시 깨어날 수 없는 영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죽어보지 않고서야 자기가 다시 깨어날지 안 깨어날지는 모르는 것이다. 우리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나도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유추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잠의 또 다른 유사성은 자연스러움이다. 현대인들은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밤새도록 필사적으로 일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잠은 우리를 쉽게 다시 점령한다. 책상머리에 앉아서도 꾸벅꾸벅 조는 것이 자연스럽다. 마찬가지로 때가 되면 찾아 오는 죽음도 자연스러운 인생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삶을 존중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음 또한 존중하는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을, 이미 뇌사한 사람을 산소 마스크 씌워놓고 붙들고 있는 것은 진정 생명을 소중히 하는 태도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떠나는 사람에 대한 살아있는 자의 이기적 미련일 뿐이다. 죽음을 자연스런 생명의 과정으로 본다면 죽음도 여러가지 잠자는 스타일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논술작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4년 중임제 개헌  (0) 2012.08.18
죽음이 사라진 사회  (0) 2012.08.14
공기업 민영화  (0) 2012.08.11
힐링  (0) 2012.08.06
다문화사회  (0) 2012.08.03

설정

트랙백

댓글

공기업 민영화

논술작문 2012. 8. 11. 04:37

영화 로보캅에는 경찰이 민영화 된 디트로이트 시티가 등장한다. 시의 재정압박에 못 이겨 민영화 된 경찰 서비스는 공공성을 잃고 사적 이익을 쫓는 경찰들을 만들어낸다. 시민을 위한다는 사명감을 잃은 경찰들은 도시 치안은 내팽겨치고 자신들의 고용주가 된 거대기업 OCP를 상대로 임금협상에만 골몰한다. 도시의 치안은 엉망이 되고 각종 범죄가 급격하게 증가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이는 민영화의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민영화를 하지 말아야 할 부문이 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현 정부 들어 공기업 선진화라는 명분으로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대체로 민영화를 지지하는 편에서는 경쟁을 통한 공공재 가격하락, 경영 효율화, 정부부채 축소 등을 근거로 선진화라는 논리를 편다. 실제로 POSCO, KT&G 등의 공기업들이 민영화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기업들은 민영화 했을 시 경쟁체제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산업이었다. POSCO 민영화 당시 이미 수입철강들이 국내시장에 진출해 있었고 현대제철, 동국제철 등이 존재했다. KT&G 또한 국내시장이 개방돼 있었기에 찬성론자들이 말하는 경쟁체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현재 정부의 민영화 논의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인천공항이나 KTX는 국가주도의 자연독점기업으로서 경쟁기업이 없다. 자연스레 민영화는 일부 민간자본에게 독점권을 넘겨줌으로써 시장을 왜곡하고 공공 서비스의 가격을 상승시킬 소지가 크다.

 

경영 효율화가 근거가 되기에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6년 연속 세계공항 경쟁력 순위 1위의 인천공항과 매년 안정적인 흑자를 내고 있는 KTX의 경영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결국은 공기업 매각수입을 이용해 정부 재정적자 폭을 줄이려는 의도가 가장 그럴듯하게 보인다. 하지만 현재 우리 정부의 재정적자 폭은 GDP 대비 2% 정도로 다른 OECD 국가들이 10%에 육박하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매우 건전한 수준이다. 결국 찬성론자들이 내세우는 공공재 가격하락, 경영 효율화, 정부부채 축소의 주요한 세가지 목표는 정당성을 갖기 힘들다. 또한 오랫동안 적자를 보고 있어 민영화가 더 시급한 일반열차 부분을 제쳐 두고, 안정적인 고수익을 내고 있는 KTX만 민영화하려는 시도는 일부 대기업과 정부 고위인사의 배만 불린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문제는 공기업을 민영화해서 민간자본이 독점력을 가질 경우 그 폐해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맥커리에 매각한 시드니 공항의 이용료는 9배로 치솟았다. 얼마 전 서울 지하철 9호선 요금인상 시도는 민영화의 부작용이 결코 기우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후에 생길 해악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민영화는 공기업 선진화가 아닌 우리의 공공시설을 사유자본에 포로로 넘겨주는 꼴이 된다. 이를 막기 위해선 장기간에 걸친 여론수렴을 통해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들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투명한 정책결정과정을 통해 국민들에게 믿음을 줘야 한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민영화 사업은 정권 말기에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 없이 졸속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국민의 반절 이상이 반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인천공항, KTX 민영화의 찬성론자 중 일부는 지속적인 기업의 발전을 위한 투자재원 확보 차원에서 지분의 일부를 매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투자재원은 민영화가 아니라 먼저 막대한 흑자분을 통해 조달하는 것이 순리이다. 수지가 악화되면 그 때 가서 민영화 해도 늦지 않다. 진짜 시급한 것은 지속적인 적자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다른 공기업들이다. 정부가 국가부채 증가의 진짜 범인은 안중에도 없고 오히려 계속해서 수익성 높은 공기업들을 민영화하려 한다면 제사엔 관심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논술작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이 사라진 사회  (0) 2012.08.14
죽음 - One of sleeping style  (0) 2012.08.14
힐링  (0) 2012.08.06
다문화사회  (0) 2012.08.03
노예 군인  (0) 2012.07.31

설정

트랙백

댓글

힐링

논술작문 2012. 8. 6. 22:51

아스팔트 길이 이글거린다. 팔월의 태양은 이미 내 등짝을 벌겋게 태워놓고 있었다. 숨이 막힌다. 패달을 구르는 발은 감각을 잃은 지 오래다. 이마 위로 흐른 땀이 눈에 들어가 따갑다. 입술이 짜다. 길 옆으로 펼쳐진 푸른 바다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나는 지금 무얼 향해 가는가. ‘제주도 자전거 여행의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저 앞사람의 자전거 꽁무니만 쫓아 기계적인 발구름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여행을 계획한 건 학교 시험으로 지친 심신을 쉬게 하려 한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유유자적하며 제주의 아름다움과 새로운 경험을 통해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지에 도착해 한 친구가 제안한 제주도 한 바퀴 완주는 나의 낭만적인 계획을 완전히 뒤집어 엎었다. 완주라는 뚜렷한 목표와 결승점이 생기고 나니 친구들 사이에선 은근한 경쟁심이 생기게 됐고 여행은 경주가 됐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새로운 체험도 없었다. 이미 시험으로 힘들어진 심신을 또 다른 경쟁과 나에 대한 채찍질로 닥달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위가 파도에 부서질 때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섯 명 중 꼴지로 달리던 나는 전속력으로 나머지 자전거들을 앞질러 선두에 선 뒤, 갑작스레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다른 친구들도 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차례로 멈췄다. 모두 너무 힘겨워 보였다. “우리 지금 뭐 하는 거니? 우리가 원했던 게 이런 거였어?” 나의 말에 제주도 해안도로 182km 완주를 제안한 친구는 그래도 한번 세운 목표는 달성해야 하지 않겠냐고 맞섰다. 결국 전체 의견 또한 둘로 갈리었고 해가 저무는 탓에 일단 주변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멀리 매운탕집이 보였고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매운탕이 보글보글 끓는 사이 주인집 아저씨 내외와 대화를 나누게 됐다. 여행얘기부터 자식걱정, 학교생활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토박이 부부는 우리와 참 통하는 게 많았다. 아저씨는 공짜라며 광어회와 소주를 내왔고 우리도 챙겨온 안주거리를 풀어 밤이 늦도록 이야기 꽃을 피웠다. 우리가 밖에서 텐트 치고 야영할 계획이라고 하니 가게에 빈방이 있다며 공짜로 자고 가란다. 심지어 아침밥도 차려놓을 테니 먹고 가란다. 너무나 고맙다. 말로만 듣던 우리네 인심을 피부로 느낀 순간이었다. 그날 밤 우리 일행은 여행 중에 서로 하지 못했던 속 깊은 얘기를 나누며 쌓였던 갈등을 풀었다. 멀리 파도 소리가 평화롭다.

 

다음 날, 웬일인지 몸이 날아갈 듯 개운했다. 식탁 위에는 잘가라는 편지와 함께 아침밥이 펼쳐져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여행의 진짜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며 서로를 쳐다보며 껄껄 웃었다. 끝내 제주해안 182km를 완주하진 못했다. 하지만 항상 어떤 목표를 세우는 습관이 여정을 전혀 즐겁지 않은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원했던 것은 이미 얻었다. 그날 밤, 매운탕집 부부와 나눴던 정과 친구 사이의 속 깊은 대화가 삭막한 도시의 경쟁에 지쳐있던 나를 힐링했던 것이었다.

 

'논술작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 - One of sleeping style  (0) 2012.08.14
공기업 민영화  (0) 2012.08.11
다문화사회  (0) 2012.08.03
노예 군인  (0) 2012.07.31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  (0) 2012.07.23

설정

트랙백

댓글

다문화사회

논술작문 2012. 8. 3. 14:50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회가 근친상간을 금지한다.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 금기는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닌 문화적으로 습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안 되는지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전자의 다양성 추구를 통해 자손의 유전적 결함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유전병을 막는 것만이 아닌 근친혼 금지를 통해 가족제도를 안정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한 사회구조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유전적 다양성 추구와 사회제도 지키기의 보수적 성격이 긴장 속에서 공존하는 것. 이게 바로 근친상간 금지의 실체다.

 

다문화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다민족 사회는 용인하면서도 다문화 사회는 꺼려지는 것이 한국인의 대체적인 정서다. 각종 사회-경제적 요구에 의해 이민족의 유입은 허용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한국의 색깔을 입히려고만 하지 그들의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더 나아가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려 하지는 않는다. 필리핀 며느리가 김치를 잘 담근다고 칭찬하지만 필리핀의 전통음식이 무엇인지는 관심도 없다. 인도인 노동자가 한국말을 잘한다고 신기해 하지만 그들의 언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살게 해주는 대신 한국문화를 따라야 한다는 문화적 패권주의는 급격하게 유입되는 외부세력에 의해 문화적 주도권이 약화되진 않을지 하는 조바심으로부터 나온다. 결국 근친상간의 예에서와 유사하게 민족적 다양성 추구와 문화적 정체성 수호, 두 가지 키워드가 파열음을 내며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적 강요가 이민족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이 우리 사회에 융화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융화되지 못한 사람들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부유하기 마련이다. 이는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각종 사회문제를 발생시켜 사회적 비용을 상승시킨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서로 대립하는 키워드인 민족적 다양성 추구와 문화적 정체성 수호 간의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것이다.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는 유전적 다양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가족제도를 안정시켜 기존의 사회구조를 수호하는 방식으로 변화와 보수 간의 긴장관계를 해소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민족의 문화를 모두 인정하는 길이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다민족 사회의 긴장관계 또한 해결되지 않을까?

 

이를 위해선 문화에 대한 인식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 음식문화를 대표하는 김치가 지금의 형태를 갖춘 것은 17세기 초에 일본으로부터 고추가 전래된 이후이다. 일본은 포르투갈로부터 고추를 받아들였고 포르투갈은 고추의 원산지인 중부 아메리카로부터 가져왔다. 멕시코의 매운 음식 문화를 떠올린다면 우리가 자랑스러워 하는 김치도 결국은 다른 음식문화들과의 문화접변을 통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K-POP도 서양의 음악에 우리의 색깔이 덧입혀져 우리의 독특한 문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결국 문화적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문화적 교류를 통해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바뀌고 나면 민족적 다양성 추구는 문화적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닌 정체성의 형성과정 그 자체가 되어버리고 긴장관계는 사라진다. 영어가 세계언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과 미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과 더불어 다양한 언어들의 특성을 받아들여 영어가 가진 문화적 저변을 넓혔기 때문이다. 반면 수많은 소수민족의 언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자기 것만을 고수하여 언어적 고립을 자초한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정체성을 지키려던 노력이 오히려 그들 언어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시간이 흘러 정체성을 완전히 소멸시킨 것이다. 결국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선 다른 문화도 지켜주고 더 나아가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근친상간의 금지가 유전적 다양성 확보를 통해 사회의 번영을 도왔듯 이민족들의 다양한 문화가 한국 문화 발전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논술작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기업 민영화  (0) 2012.08.11
힐링  (0) 2012.08.06
노예 군인  (0) 2012.07.31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  (0) 2012.07.23
박근혜 김정은 비판 비교 2  (1) 2012.07.20

설정

트랙백

댓글

노예 군인

논술작문 2012. 7. 31. 00:53

풀이 질기다. 질경이. 이름처럼 잘 뽑히지 않는다. 그 옆으로 보드라운 강아지풀과 해맑은 민들레가 기다리고 있다. 호미에 뿌리가 찍혀 나와 내던져진다. 평소 정겹던 들풀은 잡초라는 이름으로 제거대상이 됐다. 지쳐가는 호미질에 땀이 흐른다. 벌써 두 시간째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고 있다. 30도를 훌쩍 넘는 8월의 땡볕에서 나는 왜 풀을 뽑고 있는가. 쪼그려 앉은 다리가 저려오고 팔의 힘도 빠져나간다. 멀리 나무 그늘에선 최중사와 김병장이 한가롭게 우리를 바라보며 부채질을 하고 있다. 노예. 지금 내 모습에서 나는 노예의 모습을 떠올린다. 주인은 놀고 노예는 일을 한다. 그들은 놀고 나는 일을 한다. 무언가 잘못됐다.

 

다음 주에 공군 본부에서 투스타가 부대를 방문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부대 내의 온갖 풀들을 뽑아야 한단다. 풀은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고 몸은 너무 힘들다. 나는 호미를 내려두고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나무 밑에서 놀고 있던 최중사에게 갔다. “지금 풀을 뽑는 일이 나라를 지키는 일입니까?” 나는 자갈밭 사이사이로 자란 들풀을 뽑는 것이 국방이냐고 물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다그쳤다. “군대서 까라면 까는거지 뭔 말이 많아? 그렇게 하기 싫으면 너 혼자 들어가 쉬어!” 말문이 막혔다. 그렇지만 동기들과 후임들이 힘들게 일하는데 나만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전략이 아닐까 생각하며 조용히 호미를 들고 민들레 줄기를 꺾었다. 하얀 진액이 흘러나왔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군대의 강제사역이 노예노동과 같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누가 시키기 전에 시킬만한 일들을 찾아 알아서 하곤 했다. 남이 강제로 시켜서 하는 것은 내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기에 차라리 시키기 전에 선수치는 것이 자유의지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조차 부질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누가 내게 강제로 일을 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 일을 먼저 찾아서 하는 것은 이미 자유의지와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상관에게 그저 생각만으로도 조종이 가능한 로봇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나의 노예해방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그저 다른 노예들 틈에 끼어 최대한 나를 숨기며 죽은듯 살았을 뿐이다. 분명한 건 개인의 노동을 국가가 강제한다면 나를 국가가 소유하는 것이 되고 개인은 국가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것이다법은 군인의 자유가 국방의 의무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전투훈련이 아닌 관습적인 강제사역이 과연 나라를 지키는 일인지는 의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 날의 풀 뽑기는 상관의 눈에 들기 위해 하급자의 노동력을 부당하게 이용한 권력남용에 가까워 보인다.

 

 

'논술작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힐링  (0) 2012.08.06
다문화사회  (0) 2012.08.03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  (0) 2012.07.23
박근혜 김정은 비판 비교 2  (1) 2012.07.20
박근혜 김정은 비판 비교 1  (0) 2012.07.19

설정

트랙백

댓글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

논술작문 2012. 7. 23. 16:39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악당 조커는 범죄조직으로부터 훔친 산처럼 쌓인 돈을 모두 불태워 버린다. “중요한 것은 돈이 아냐, 메세지지불타는 돈을 두고 하는 그의 말은 돈을 태우는 행위 이면의 메세지에 주목하게 한다. 경제학의 '신호보내기' 이론은 광고를 통해 이를 설명하는데 막대한 광고비가 들어갈수록 해당 제품이 잘 팔려야 기업은 생존가능하다. 그렇기에 아예 돈을 다발로 태우는 광고는 제품의 품질에 대한 기업의 자신감을 보여주고 소비자들이 주저 없이 그 제품을 사게 만든다. 이러한 신호보내기는 대학졸업자의 고용시장에서도 적용된다. 비싼 등록금 내고 배운 것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명문대 졸업생은 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끈기, 성실성, 학습능력을 갖췄다는 메세지가 중요하다기업들이 원하는 개인의 역량 또한 대체로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인재를 골라내는 저비용의 효율적인 방법은 출신대학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습은 고착화된 학벌주의를 낳았고 이런 세태를 타파하자며 최근 국공립대학 통합네트워크가 대선의 주요공약으로 떠오르고 있다.

 

  야권에선 부인하고 있지만 사실상 국공립대학 통합네트워크 방안은 서울대 폐지를 정조준 하고 있다. 2003년 경상대 정진상 교수가 민주노동당 기관지 <이론과 실천>에 처음 발표했을 때부터 이 방안은 줄곧 서울대의 위상을 끌어내려 고착화된 SKY 학벌체제에 구멍을 내려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다.  현재의 학벌구조가 무너지려면 서울대부터 잡아야 한다는 발상은 언뜻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학벌개혁이 정당하며 실효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회는 계층화 과정을 통해 개인에게 역할을 분담시킨다. 문제는 대학진학률이 83%가 넘도록 일반화된 나라에서 대학의 서열이나 위계 없이는 사회계층화 과정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력에 따라 역할을 분배하자고 하는데 실력에 따른 분배는 결국 실력에 따른 대학진학과 별 다를바 없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공정하게 실력만을 반영한다는 각종 국가고시 합격률 순위가 대학순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실력을 통한 공정성이라는 말이 기존 학벌체제를 지탱하는 수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결국 대학서열의 존치 외에는 사회계층화에 정당성을 부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대가 폐지 돼도 기존의 연고대가 서울대의 위치를 차지할 것이고 언제나등 대학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때마다 학벌개혁을 위해 일등대학이 희생당해야 한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는 통합네트워크의 지향점이 서열구조 타파가 아니라 주요대학들이 독점하고 있는 사회적 자원들의 재분배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 3급 이상 고위 공무원들의 47%가 SKY대학 출신이고 법조계 부장판사 이상 비율은 80%를 넘어선다. 이는 단지 대학 순위변동이 능사가 아니라 공직 등의 사회적 자원의 재분배를 위한 직접적인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합네트워크와 함께 논의되고 있는 출신학교의 지역에 따른 공무원, 전문직 국가면허의 지역균형 인재선발제도는 이런 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제도는 국공립대의 경쟁력을 높일 뿐 아니라 인재들의 지역분산을 통해 국가 균형발전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단순한 서울대의 폐지가 아니라 경쟁의 장을 넓혀 사회적 자원들이 보다 균등하게 배분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들이 성공할 수 있으려면 사회 전반의 구조개혁과 인식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학벌의식이 강한 이유는 학벌에 따른 소득격차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할 것은 부자증세와 복지제도 확충을 통한 사회 안전망 확보와 사후 소득격차 완화이다. 이러한 제도의 개혁이 선행될 때에야 입시위주 교육, 무분별한 대학진학, 청년실업 등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소득격차의 완화는 직업의 귀천에 대한 집착보다 자기가 정말 잘하고,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국가적으로도 인적자원의 효율적 배치가 가능해진다. 실제로 덴마크나 핀란드 등의 복지국가에서는 벽돌공이나 청소부들도 자기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사회적으로도 존중 받는다고 하니 말이다. 이는 우리의 학벌개혁이 비단 서울대 없애기나 서열구조 개편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학서열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서열의 존재가 불가피하다면, 굳이 서울대를 통합 네트워크 안에 넣어야 할까? 서울대의 위상은 나머지 국공립대학보다 월등하기에 서울대와 동문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 분명하고 실현가능성도 희박하다. 또한 서울대 폐지에 해당하는 기존 안의 고수는 대학의 자율성을 해치고 백 년 가까이 되는 대학의 문화와 학풍을 말살한다. 국립대이기에 정부가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발상은 폭력에 가까워 보인다. 차라리 스스로 원하는 국공립 대학들이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정부가 집중투자-육성하는 방식이 대학 공교육 경쟁력 강화의 취지에도 맞을 것이다. 만약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가 정부 의도대로 성공한다면 자연스레 학벌체계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고 기존의 명문대들도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날이 올 것이다. 결국, 진짜 중요한 것은 대학서열이 아니라, '서열에 집착하게 만드는 사회구조 개혁이 먼저'라는 메세지일 것이다.

 

 

'논술작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문화사회  (0) 2012.08.03
노예 군인  (0) 2012.07.31
박근혜 김정은 비판 비교 2  (1) 2012.07.20
박근혜 김정은 비판 비교 1  (0) 2012.07.19
행복  (2) 2012.07.17

설정

트랙백

댓글

박근혜 김정은 비판 비교 2

논술작문 2012. 7. 20. 21:16

 당신의 몸뚱어리는 그저 유전자의 탈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옥스포드대 리처드 도킨스 박사는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여러 데이터들과 과학적 근거들을 가지고 전개하는 그의 이론은 다윈 이후 진화생물학계가 전진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유전자와 닮은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퍼뜨리고 존속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그의 이론은 여러 논란 속에서도 수많은 증거들을 바탕으로 학계의 정설로 자리잡아 가는 중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박정희의 최대목표는 박근혜를 만드는 것이고 김정일의 목표는 김정은을 만드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김정은을 만드는 건 그의 할아버지 김일성의 목표였을지도 모른다. 국가권력의 정점에 서려는 두 사람에겐 그 아버지들의 권력의지가 유전자를 타고 이어지고 있다. 혈연이란 이름으로 그들을 관통하는 건 유전자를 비롯한 여러 유산들이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 두 독재자의 자식이 그 아버지의 자리를 승계하면 안 된다는 비판은 마땅히 아버지와 자식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장 원초적인 연결고리인 유전자는 자식에게 외모를 물려준다. 김정은은 아버지를 닮음과 동시에 놀랍게도 젊었을 적 김일성을 닮았다. 닮은 외모는 그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활용해 내부를 결속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이미지 정치는 어릴 적 아버지 곁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가녀린 딸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는 박근혜에게서도 나타난다. 닮은 외모를 통해 아버지의 이미지를 차용하려는 시도는 아무런 업적 없이 권력을 얻으려는 두 자식의 한계를 반증한다. 능력의 검증이 아닌 과거 지도자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두 사람에 대한 비판은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라도 타당하게 들린다.

 

  유전자 수준을 넘어 자식들에게 남겨진 것은 재산이다. 박근혜는 아버지로부터 정수장학회를 비롯해 육영재단, 영남재단 등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권력을 승계한 김정은이 김정일로부터 천문학적인 재산을 물려받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이 재산이 독재체제 하에서 불법적으로 축적되었거나 인민의 피땀을 착취한 결과라는 데 있다. 이런 재산으로 호의호식한 두 사람의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공격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재산 외에도 아버지가 남긴 것은 그의 추종세력이다. 김정은을 후계에 옹립한 것은 김정일 체제의 핵심인물이었던 장성택과 최룡해 등이며 그들은 현재 김정은이 제창한 유훈통치의 상징적 인물이다. 문제는 박근혜의 추종세력이 상당수 군부독재에 결탁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박근혜가 독재자가 될 위험은 없다고 하나 추종세력과 현재의 불통 이미지를 고려했을 때 우려할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칫 독재 추종자들에 의해 세워진 정부의 꼭두각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평가요구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아버지의 독재가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그녀의 발언은 우리의 우려가 공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사회적 지위 또한 남겼다. 김정일은 김정은을 후계자로 공식 지명하고 죽기 전부터 권력이양의 정지작업을 함으로써 북한 최고 지도자 지위를 직접적으로 상속했다. 비록 권력을 직접 상속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박근혜 또한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 하는 수많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간접적 권력 승계의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본질적으로 박근혜와 김정은의 권력에 대한 접근방식은 다르지 않다. 모두 아버지의 유산과 후광을 이용한 것이며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은 사람이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는 불공평하다. 문제는 양 체제의 법과 제도가 두 사람의 권력승계 시도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선택은 국민의 결정에 달렸다. 우리 삶의 절대적 기반인 국가마저 죽은 독재자의 유산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논술작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예 군인  (0) 2012.07.31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  (0) 2012.07.23
박근혜 김정은 비판 비교 1  (0) 2012.07.19
행복  (2) 2012.07.17
종북논란에 대하여  (0) 2012.07.12

설정

트랙백

댓글

박근혜 김정은 비판 비교 1

논술작문 2012. 7. 19. 16:35

우리는 흔히 여론을 선동하는 행위를 일컬어 여론을 조장한다고 한다. 조장(助長)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맹자가 그의 제자 공손추와 정치에 대해 얘기하다 나온 일화에서 유례됐다. 중국 송나라에 성격이 급한 농부가 살았는데 그가 보기에 그의 논의 벼가 너무 더디게 자라는 것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농부는 어느 날 묘책을 냈고 논에 있는 모든 벼를 엄지 손가락 한마디만큼씩 위로 뽑아 당겨주었다. 농부가 늦은 저녁에 집에 들어와 자랑스레 이 얘기를 하자 농부의 아들은 깜짝 놀라 서둘러 논에 가보았지만 벼들은 모두 말라 죽어 있었다. 농부의 기준에서 조장은 벼가 빨리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으나 벼의 입장에서는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이처럼 자기 기준으로 섣부르게 남을 재단하려는 태도는 위험하다. 최근 박근혜를 겨냥한 독재자의 딸 대통령 불가론과 김정은에 대한 3대세습 비판 또한 자기 기준으로 섣부르게 남을 재단하는 여론의 조장이 아닐 수 없다.

 

근대 자연법 사상은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자유를 전제한다. 이러한 자연법의 원리에 따르면 ‘~해도 된다가 기본이 되며 ‘~하면 안 된다가 예외가 된다. 이러한 예외는 각 사회가 동의하는 방식과 절차에 따라 정당성을 얻어야만 인정된다. ‘독재자의 딸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 ‘김정은의 3대세습은 안 된다등의 주장은 모두 각각 사회가 정하는 준거 틀에 따라 그 정당성 여부가 판단되어야 한다.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감정적인 여론선동이나 우리와 다른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닌 자연법적 기준 위에 각 사회가 가진 특성을 고려한 합리적인 비판이 요구된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의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헌법은 그 목적이 합리적이다. 이러한 실질적 합리성에 덧붙여 법이 목적달성을 위해 제대로 만들어져 있고 개인이 위법한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절차적 합리성은 획득된다. 실질적 합리성과 절차적 합리성이 모두 확보될 때 개인의 행위는 사회가 동의한 준거 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게 된다. 대한민국 헌법이 그 가치실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제헌 이후 60여년 역사가 잘 보여주기에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판단은 박근혜 개인에 대한 법적인 판단에 따른다. 헌법은 개인의 참정권을 보장한다. 40세 이상의 모든 국민은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박근혜는 대선출마가 가능하다. 헌법 13 3항은 모든 국민이 자기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연좌제에 대한 헌법상의 금지는 아무리 독재자의 딸이라고 해도 그녀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박근혜가 아버지에게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생각을 핑계로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야권의 주장을 무력화한다. 헌법적 판단에 비추어 볼 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상대 대권주자에 대한 폄훼에 불과하다.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민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통치이념인 주체사상도 북한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로서 실질적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존에 고수해 오던 인민민주주의 헌법이 1972년에 사회주의 헌법으로 개정되면서 수상체제가 주석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는 주석 독재체제를 북한 헌법이 인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독재는 공산주의 사상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부터 파생되었으며 사회주의 혁명 완수를 위한 그들 나름의 합리적 절차로 여겨진다. 독재에 대한 법적인 인정은 존재하지만 권력세습에 대한 견제장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에 김정은의 3대 세습에 대한 법적인 하자는 없다. 혹자는 권력세습이 사회주의 이념과 맞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회주의는 정치제도가 아닌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문제이다. 지금껏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북한체제에 대한 섣부른 비판은 '조장'이 될 수 있다.

 

나의 기준으로 남을 멋대로 재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오만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한국에서 과거를 독재라고 비난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무시한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근거로 다른 체제를 비난하는 것 또한 다른 가치들에 대한 무지로부터 나오는 아집에 불과하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존하며 경쟁하자. 정말 나쁜 것은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다. 만약 정말 박근혜가 대통령감이 아니라면 대선에서 낙마할 것이고 김정은의 3대세습이 정당하지 않다면 북한 내부의 반발에 무너질 것이다. 상대에 대한 이해 없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말고 각자 나름의 방식이 있음을 인정하자. 사회의 발전이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말고 모든 시도들이 더 나은 사회건설을 위한 것임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논술작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  (0) 2012.07.23
박근혜 김정은 비판 비교 2  (1) 2012.07.20
행복  (2) 2012.07.17
종북논란에 대하여  (0) 2012.07.12
잃어버린 인생 (논제-술)  (0) 2012.07.10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