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술작문 2012. 4. 13. 13:05

‘2% 부족할 때내가 고등학생일 때 잘 팔렸던 한 음료수의 광고카피이다. ‘2%’는 실제로 이 음료수의 이름이기도 했다. 체육시간, 친구들과 햇빛이 내리쬐는 운동장을 헐떡이며 달리다 경기가 끝나면 우리는 으레 자판기로 달려가 음료수를 뽑아 마시곤 했다. 나는 그 특유의 향 때문에 2%를 즐겨 마셨다. 그런데 그 때 꼭 돈이 없어서 음료수를 마시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 나는 그 친구와 번갈아 가며 향긋하게 갈증을 축여주는 그 놈을 사이 좋게 드링켰다’. 친구와 반을 나눠 마셨으니 우리가 먹은 것은 더 이상 2%가 아니라 1%였다. 하지만 그 친구의 시원하다며 내뱉는 탄성과 내게 고맙다며 짓는 진심 어린 눈빛을 보았을 때, 내 에너지는 2%가 아닌 100%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1%의 나눔은 나에게도 너에게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1%의 의미는 보다 원초적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체로 자기 인생의 1%를 태어나기 위해 투자한다. 산모는 자기 인생의 1%를 한 아이를 위해 투자한다. 이 투자의 다른 이름은 나눔이다. 산모와 아기는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같은 음식을 나누고, 체온을 나누며, 숨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나눈다. 결국 나는 어머니와 인생의 1%를 서로 공유한 셈이다. 그러한 나눔이 있었기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다. 1%의 나눔은 이렇듯 생명을 배태하고 새로움을 창조한다.

얼마 전 신문에서 포스코 임직원들의 월급 1% 기부운동에 대해 읽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직원들로서 그보다 못한 형편의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월급의 1%를 기부한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이미 태어나면서 진 1%의 빚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일까? 1% 99%의 사회라고 한다. 1%의 사람들을 위해 99%가 봉사하는 사회, 뉴욕 월가의 점령하라시위는 1% 99%로 나뉜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사회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나뉘었지 나누지 않는다. 상위 1%의 사람들이 과연 그들 가진 몫의 1%라도 나누는가? 나누지 않는 사회는 나뉘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나뉜 1%는 다른 99%에 의해 점령당할 수밖에 없다.

%는 이미 나뉨을 배태하고 있다. 전체로부터 일부분을 떼어놓는 사고방식은 %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기호의 모양 또한 작대기( / ) 하나가 두 개의 동그라미(ㅇㅇ)를 나누어 놓는다. 문제는 이렇게 나뉘어진 두 동그라미가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와 아()의 구분은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고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하나가 되는 것은 그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야 내가 태어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랴. 그런데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나눠야 한다. 부부는 이불을 나누어 덮어 하나가 되니 나눔은 하나가 되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과도하게 나뉘어져 있다. 이제라도 더 이상 나눠지지 말고 나누자. 1%를 나누어, %보다는 1에 집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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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의 공정성

논술작문 2012. 4. 13. 13:04

봉이 김선달은 넘실대는 대동강 물을 황송아지 60마리 살 수 있는 돈을 받고 팔았다고 한다. 단지 설화인지 실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 사유재산권의 개념이 사람들에게 어수룩하게나마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는 강물이 사유권이 인정되지 않는 공유자원임을 익히 알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중요한 자원으로 떠오른 전파 또한 공유자원이다. 전파는 경합성과 비배제성을 모두 지니는 공유자원으로서 만약 전파의 사용을 자율에 맡겨 놓는다면 전파의 대역대가 중첩되어 아무도 자신들의 사용목적에 맞게 전파라는 자원을 활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특정 사업자에게 전파의 독점적 사용권을 부여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공공 서비스로서의 방송을 요구한다. 방송이 공정해야 하는 것은 공유자원인 전파의 소유권이 어느 한 개인이 아닌 모든 시민들에게 있기 때문이며 공정하지 못한 방송은 애초에 독점적 사용권을 부여한 시민과의 계약을 위반한 것이다.

그렇다고 방송사에 공정성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 애초에 방송 사업자는 사익을 위해 주파수에 대한 독점권을 구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방송에 공정성만을 바라고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공정하지 못하다. 시민과 개인 간의 교환관계의 산물인 방송의 성격 상 시민들은 방송의 자율성 또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방송사는 이 자율성을 기반으로 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자율성과 공공성이 대립되는 개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방송사가 자율성을 이유로 공정성을 침해한다면 시민사회에 지불하는 공공 서비스의 가치가 줄어들 것이고 애초 계약과 다른 불량품에 높은 가격을 지불한 시민들은 환불을 요구할 권리를 지니기 때문이다. 방송사는 공정성을 유지하는 선에서 자율성을 추구해야 한다. 방송의 자율성 속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이 공정할 때 시청자들은 그 방송사를 신뢰하게 되고 이러한 높은 신뢰도는 시청률과 높은 수익으로 이어진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방송의 공정성과 사익을 위한 자율성은 충분히 양립 가능하다.

공자가 춘추에서 노나라의 역사를 기술할 때에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는 동시에 대의명분에 맞는 주석을 달았던 것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 공정성의 본질은 이러한 춘추필법과 닮아 있다. 방송 제작자는 객관적인 사실과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균형감각을 바탕으로 공공의 이익이라는 대의명분에 맞는 방송을 제작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한쪽 입장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의견을 배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현상을 포착하여 전달하는 과정에서 완벽히 중립적인 입장에 있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방송 제작자가 현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에 따라 사안의 성질은 달라지며 균형점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상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통해 시민들의 이해를 돕는 것이 시민과 방송사 사이의 교환관계를 공정하게 하는 것이다.

사회 간접자본으로서 방송은 공정성을 갖출 때, 그 질이 향상되고 국가의 생산성을 고양시킨다. 이러한 생산성은 비단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전 부문에 미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방송의 공정성이 더욱 절실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이다. 전파라는 공유자원을 주고 받은 물건이 진품인지 짝퉁인지 확인하는 일은 시민인 우리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이지 누가 대신 해주지 않는다. 만약 그 것이 짝퉁이라면 우리는 당당하게 환불을 요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요즘 진행 중인 언론사의 파업은 오히려 방송 제작자들이 나서고 시민들은 이를 관전하는 양상이다. 주객전도의 기현상을 목도하며 그나마 방송 제작자들에게서 춘추정신을 읽는다. 공정성은 방송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가 만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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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신드롬

논술작문 2012. 4. 13. 13:03

영화 달콤한 인생의 시작은 제자가 스승에게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나무가 움직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바람이 움직이는 것입니까스승은 대답한다. “움직이는 것은 나무도 바람도 아니다. 바로 너의 마음이다.” 인간과 세상의 이치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사 모든 것이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는 이 가르침은 금명간의 정치현상과도 일맥상통한다.

국민이 흔들리고 있다. 정치권도 그대로이고 안철수도 그대로이다. 정치권은 지금도 변함없이 국민들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고, 안철수도 한결 같은 모습으로 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움직이는 것은 국민의 마음일 뿐이다. 현직 대통령은 국민의 소통요구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정치권은 선거의 목전에서 부랴부랴 쇄신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변하지 않는다. 한편 안철수라는 사람도 자신의 영역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차곡차곡 쌓는다. 이쯤 되면 국민들의 마음이 왜 흔들리는지 알만도 하다.

현대사의 오랜 기간 동안 민주화라는 아젠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정치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민주화를 갓 이뤄낸 시점에서 터진 외환위기는 그 시선을 다시 경제문제로 옮겨 놓았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이슈보다는 내 눈 앞의 생계가 급하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취직문제가 최우선 과제다. 이를 위해 학점을 올리고 스펙을 쌓으며 개인적인 돌파를 시도했지만 다수의 젊은이들이 현실의 높은 벽에 절망하면서 이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거기에 SNS의 등장과 같은 기술적 진보가 기폭제가 되어 정치권으로부터 멀어진 젊은이들을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제는 젊은이들을 필두로 국민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

국민은 기존과는 다름을 열망한다. 대통령도 정치권도 이미 그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한 동안은 그러한 신뢰의 상실이 정치에 대한 염증과 혐오로 귀결되었다. 갈수록 낮아지는 투표율은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이제는 국민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았다. 그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신뢰가 가는 사람을 원한다. 비단 전문성뿐만 아니라 높은 도덕성을 갖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안철수라는 인물이 위치하고 있다.

그는 대학교수로서 학생들을 접하고 청춘 콘서트라는 자리를 통해 젊은이들과 그들의 문제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었다. 현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언론탄압을 통해 소통이 화두가 된 오늘 날, 절망적인 현실에 분노하는 젊은이들의 열망은 과연 어떤 창구를 통해 분출 하겠는가. 이것이 SNS를 통해 증식하는 안철수 현상의 실체이다.

바야흐로 격변의 시기이다. 김정일 사후 북한의 정치적 혼란이 우려된다. 유럽 발 금융위기도 그 추이가 심상치 않다. 여기에 국내의 산재한 문제들은 더욱 골치가 아프다. 이럴 때일수록 높은 도덕성을 바탕으로 국민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신뢰받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나무와 바람이 아무리 흔들려도 국민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도록 믿음을 주는 지도자가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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