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현상

논술작문 2012. 4. 13. 12:58

피에르 부르디외는 현실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지배적 문화에 적합한 언어나 상징적 표현, 생활양식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높을수록 문화자본을 많이 소유하게 된다. 문화자본의 소유는 정치, 경제적 권력의 분배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문화자본을 많이 소유하기 위한 경쟁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 경쟁에 가장 유리한 전략은 자기 문화를 지배적 문화로 만드는 것이다. 한류라는 말랑말랑한 겉모습의 이면에는 지배적 문화가 되기 위한 구조적 권력관계의 형성과 그 고착화 과정이 똬리를 틀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의 드라마가 중국에 수출되기 시작하면서 중화권을 중심으로 한류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한국의 문화상품은 중화권을 필두로 일본, 동남아 등지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근래에 들어서는 유럽, 남미 등에서도 호응을 얻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시작은 우리 문화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과도기적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모더니즘 단계에 있는 중국의 눈에 한국의 문화는 극단적 이질감을 피하는 동시에 세련돼 보인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의 일본 중년에게는 잘나가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한국 드라마에 대한 애착으로 나타난다. ‘과도기적 문화는 이처럼 문화적 역량보다는 문화 구조의 이점으로 교묘하게 아시아 사람들의 기호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한류열풍은 문화라는 소프트웨어적 개념과 이를 생산하고 상품화하는 하드웨어적 시스템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한국의 여러 연예 기획사는 문화상품의 기획부터 생산, 마케팅, 판매, 투자에 이르기까지 제조업과 비견될 정도의 체계적 효율성과 자본력을 갖췄다. 이를 통해 생산되는 문화상품은 그 질적 측면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가지며 대량생산, 유통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한류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한국의 문화상품은 아시아를 석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한국 사람들의 문화가 아닌 일부 기업의 문화상품 생산 시스템에 의한 것으로서 문화적이기보다는 구조적인 현상이다.

  질량이 큰 물체가 그만큼 세게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다는 인력의 법칙은 문화현상에도 적용된다. 규모가 크고 힘이 센 문화에 문화적 영향력이 작은 나라들은 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최근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미치고 있다. 아시아에서 세력을 키운 한국의 문화 상품이 더 큰 힘으로 외부의 수요자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이는 물리현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구조적 필연성을 지닌다. 한류는 단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탄탄한 구조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한류는 소프트웨어적이기보다는 하드웨어적이며 문화적이기보다는 구조적이다. 과연 한국 사람들은 문화인인가. 우리들이 정말로 수준 높은 문화를 생산하며 향유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머뭇거릴 수 밖에 없다. 한류의 실체는 한국 사람들 전반의 문화적 역량이 반영된 것이 아닌, 삼성이나 현대의 제조업처럼 소수의 기업이 기획하고 생산한 수출상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류열풍으로 한국의 이미지가 좋아지고 우리의 문화상품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것은 반길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정말 문화적인지에 대해선 스스로 물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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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은 공인인가?

논술작문 2012. 4. 13. 12:57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그의 모든 인생이 TV를 통해 대중들에게 방영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이 비도덕적이라고 해서 그를 비난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지 의문스럽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절망하는 장면에선 자연스레 주인공에 감정이입 하여 그의 고통을 공감하게 된다.

흔히 연예인으로 불리는 일군의 직업인들은 다양한 대중매체에 스스로를 노출시키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 노출은 필요 이상의 범주에까지 확대되기 쉽다. 직업적인 필요를 벗어나는 사생활이 미디어를 통해 폭로되고 그로 인해 해당 연예인이 심리적, 물질적 피해를 입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진다면, 이를 공인에 대한 알 권리로 포장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연예인을 공인으로 일괄규정하고 공적 책임이라는 굴레를 씌운다면 사회 전반의 표현의 자유 위축도 염려된다. 그러한 굴레 속에서 연예인은 스스로를 자기검열 할 것이고 그들의 표현 범주는 심하게 제약당할 것이다. 이는 연예산업 전반에 경쟁력 상실을 불러올 것이며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우려가 크다. 가장 자유분방해야 하는 직업인들마저 자기표현에 있어 조심조심 몸을 사리는 판국에 일반인들은 더욱 무기력하게 표현의 자유 침해를 용인하게 될 우려가 있다.

문제의 핵심은 연예인 개개인의 인격에 있지 않고 이를 방영하는 미디어의 태도에 있다. 아무리 대중이 연예인들에게 공인의 지위에 걸맞은 행실을 강요한다 해도 대중의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미디어가 자극적인 소재를 끊임없이 공급하기 위해 연예인의 행동을 자기 입맛에 맞게 갈무리해 방영하는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대중은 미디어에 비친 연예인의 이미지에 대해 평가할 뿐이지 정말 그 사람에 대해 명확히 알고 평가할 수 없다. 오히려 연예인의 도덕성 문제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미디어의 도덕성을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요즘 TV에서 방영되는 한 개그 프로그램에 애정남이라는 코너가 있다. 이 코너의 개그맨은 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키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을 소개한다. 도덕성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갖춰야 할 것이지 연예인에게 특히 강요할 문제가 아니다. 연예인들의 영향력에 걸맞은 책임도 누가 강요할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향유하는 속에서 자신의 양심에 맡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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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있는 음식의 역설

아이디어 2011. 11. 3. 23:46



 

우리는 보통 매우 맛있는 음식을 과장하여 말할 때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게 맛있는 XX'라고 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문장으로부터 도출되는 사실은 바로 '아무도 이러한 음식의 존재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결과에 다다르게 됩니다. 지금부터 이에 대한 저의 쓸데 없는 생각들을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게 맛있는 XX'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한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겠습니다.

*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 이 부분은 사건이 두 명의 사람을 가정하고 있으며 XX를 먹고 있는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사망의 가능성과 그에 대한 인식여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사람이 사망할 수도 있고 사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에 대한 경우의 수를 나누어 따져보겠습니다.

1.
아무도 죽지 않는 경우
아무도 죽지 않았으므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음식임을 인식할 길이 없다.
xx
를 맛있게 먹을 수는 있지만 그 것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음식의 진가를 알려줄만한 단서가 없다.

2. 둘 중 하나가 죽었을 경우
1)
죽지 않은 사람은 그 음식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음식이기 때문에 나머지 한명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그 음식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음식임도 알 수 없다.
2)
죽은 사람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인식할 수 없다.

3.
둘 다 죽었을 경우
둘 다 죽었기 때문에 둘 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을 인식할 수 없다.

4.
3의 관찰자 가정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었으며 나머지 한명이 그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모두 관찰하였더래도 제 3자는 직접 먹고 맛본 것이 아니므로 그것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게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
결국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게 맛있는 음식은 존재할 수는 있으나 아무도 인식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 됩니다. 마치 카산드라의 예언과 같은 운명을 타고 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있는 음식'. 어쩌면 우리는 오늘도 이러한 음식을 먹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요^^ 길거리에서 먹음직스런 귤을 팔고 있는 아저씨를 보고 문뜩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어때요? 그럴 듯하지 않나요? 혹시라도 오류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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