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신드롬

논술작문 2012. 4. 13. 13:03

영화 달콤한 인생의 시작은 제자가 스승에게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나무가 움직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바람이 움직이는 것입니까스승은 대답한다. “움직이는 것은 나무도 바람도 아니다. 바로 너의 마음이다.” 인간과 세상의 이치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사 모든 것이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는 이 가르침은 금명간의 정치현상과도 일맥상통한다.

국민이 흔들리고 있다. 정치권도 그대로이고 안철수도 그대로이다. 정치권은 지금도 변함없이 국민들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고, 안철수도 한결 같은 모습으로 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움직이는 것은 국민의 마음일 뿐이다. 현직 대통령은 국민의 소통요구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정치권은 선거의 목전에서 부랴부랴 쇄신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변하지 않는다. 한편 안철수라는 사람도 자신의 영역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차곡차곡 쌓는다. 이쯤 되면 국민들의 마음이 왜 흔들리는지 알만도 하다.

현대사의 오랜 기간 동안 민주화라는 아젠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정치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민주화를 갓 이뤄낸 시점에서 터진 외환위기는 그 시선을 다시 경제문제로 옮겨 놓았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이슈보다는 내 눈 앞의 생계가 급하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취직문제가 최우선 과제다. 이를 위해 학점을 올리고 스펙을 쌓으며 개인적인 돌파를 시도했지만 다수의 젊은이들이 현실의 높은 벽에 절망하면서 이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거기에 SNS의 등장과 같은 기술적 진보가 기폭제가 되어 정치권으로부터 멀어진 젊은이들을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제는 젊은이들을 필두로 국민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

국민은 기존과는 다름을 열망한다. 대통령도 정치권도 이미 그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한 동안은 그러한 신뢰의 상실이 정치에 대한 염증과 혐오로 귀결되었다. 갈수록 낮아지는 투표율은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이제는 국민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았다. 그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신뢰가 가는 사람을 원한다. 비단 전문성뿐만 아니라 높은 도덕성을 갖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안철수라는 인물이 위치하고 있다.

그는 대학교수로서 학생들을 접하고 청춘 콘서트라는 자리를 통해 젊은이들과 그들의 문제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었다. 현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언론탄압을 통해 소통이 화두가 된 오늘 날, 절망적인 현실에 분노하는 젊은이들의 열망은 과연 어떤 창구를 통해 분출 하겠는가. 이것이 SNS를 통해 증식하는 안철수 현상의 실체이다.

바야흐로 격변의 시기이다. 김정일 사후 북한의 정치적 혼란이 우려된다. 유럽 발 금융위기도 그 추이가 심상치 않다. 여기에 국내의 산재한 문제들은 더욱 골치가 아프다. 이럴 때일수록 높은 도덕성을 바탕으로 국민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신뢰받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나무와 바람이 아무리 흔들려도 국민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도록 믿음을 주는 지도자가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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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대통령의 조건

논술작문 2012. 4. 13. 13:03

옥스포드의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대표적인 무신론자로서 인간 스스로가 신을 창조하고는 그에게 복종하길 원한다.”라고 하였다. 과학의 관점에서 종교를 신과 인간의 주객전도 현상으로 본 것이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원초적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심리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하고 그 필요에 의해 탄생한 것이 자신을 지켜주는 절대자, ()인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인간은 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인간 스스로의 통치,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현대의 대부분의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 중 한 형태인 대통령제의 대통령은 단지 대의 민주주의의 상징이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승전국들에 전쟁 배상을 해야 했고 그에 따라 국민들의 삶은 피폐하였다. 독일 국민들은 자신들을 절망적인 삶으로부터 구출해 줄 신과 같은 영웅을 갈망했으며 그 요구에 부응해 등장한 사람이 바로 히틀러였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난관을 해결해 줄 절대적 능력을 가진 영웅을 갈망하지만 그러한 바람은 오히려 파국을 불러오기 쉽다. 지난 대선에선 경제를 살릴 영웅을 바라며 투표해 놓고 이제 와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대통령을 비난하기 일쑤이다. 대통령의 정책과 그 결과를 차치하고서라도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우리 스스로임을 자각해야 한다. 자기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끊임없이 정치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차기 대통령의 조건은 없다. 다만 대통령의 조건이 있을 뿐이다. ‘차기라는 말은 뭔가 다음 번에는 이것보다 나아지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는 자력이 아닌 타인의 힘에 의지하려 하는 무의식적인 습성에 기인한다. 하지만 민주국가의 주인은 국민 자신이며 정치과정의 주체 또한 국민 스스로이다. 우리는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대통령에게 떠넘긴 것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민주적 상징으로서 대표자를 뽑아 놓았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의 조건이 거창할 필요가 없다. 대통령은 단지 국민을 잘 대표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대통령을 뽑는 것은 우리의 몫이므로 소통이 되지 않아 국민을 대표할 수 없는 대통령이 있다면 그것은 그를 뽑은 국민의 책임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현재의 불만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대체하기 위해 다음에는 이보다 나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다시 실망하기를 되풀이한다. 현재 한국의 정치가 만족스럽지 못한 까닭은 국민들의 참여가 단지 선거에만 집중되어 있고 대표자만 뽑아놓으면 그들이 알아서 우리를 위해 친절 봉사할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표자를 비난만 하고 금새 잊어버린다. 국민은 대표자가 하는 일들을 예의주시하며 그가 정말 우리를 대변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국민의 손으로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음을 경고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투표와 같은 방법을 통하여 그러한 선례를 만들어 끊임없이 대표자가 국민을 대표할 수 있도록 견제해야 할 것이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지 대통령이 아니다. 대통령이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부터 잘 못 된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하며 우리는 그 책임과 권리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다만 선거에서 국민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이를 정책결정과정에 잘 반영할 만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정말 우리를 대표하도록 끊임없이 견제해야 한다. 만약 전자만 있고 후자가 없다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자기 자신을 탓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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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화두를 사자성어로 말하고 이유를 설명하라.

논술작문 2012. 4. 13. 13:01

二空一二, 고대 마야문명이 인류멸망의 시기로 점쳤던 올 해도 이미 세달 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들의 예언이 실현될지 알 수 없으나 그에 앞서 그들이 왜 멸망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영화 아포칼립토는 강력했던 마야제국이 지니고 있던 멸망의 전조를 뚜렷이 보여준다. 마야인들은 오랜 가뭄과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을 제물로 삼아 하늘에 기우제를 지낸다. 나 살겠다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사회가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은 머지 않은 그들의 멸망으로 확인된다. 오히려 죽음을 목전에 둔 긴박한 상황에서도 서로 돕고 연대했던 주인공 부족은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의미를 되새겨 볼 일이다.

대구의 중학생이 자살을 했고 이 것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학교폭력이 그 원인으로 진단되고 있다. 하지만 그 폭력의 이면에는 상호연대 정신이 부족한 우리 학교 시스템과 사회 분위기가 자리한다.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자살은 사회통합 수준에 반비례한다고 하였다. 자살의 원인을 미시적 수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거시적 사회구조에서 찾은 것이다. 그의 이론에 비춰 보았을 때 한국의 학교시스템은 명백히 사회통합이나 상호연대와는 거리가 있다. 학생들은 각자 무한경쟁사회로 나가기 위해 예행연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현실은 상호연대가 아닌 이전투구의 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한 곳에서의 폭력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이들을 올바른 사회인으로 길러내야 할 학교에 문제가 있다면 결국 우리 사회에도 그 화가 미칠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올해 실시되는 양대 선거는 매우 중요하다. 각 정당은 복지를 정치적 화두로 내세우며 무한경쟁의 시장이념에서 상호연대의 기반이 될 복지사회로 그 방향키를 돌렸다. 상호연대가 없는 과도한 경쟁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양극화를 심화시켜 결국 국가경쟁력을 퇴행시킨다. 국가는 그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순망치한의 지혜를 빌어 상호연대의 사회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할 것이다.

상호연대는 국내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는 유럽발 금융위기가 올해 최대 관심사이다. 유럽이 무너지면 대외경제에 크게 영향 받는 우리나라 경제도 위태로워진다. 코스피 지수는 이미 유럽 이슈에 의해 크게 출렁이고 있다. 이가 시리지 않으려면 입술이 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무디스는 그리스 채권에 사실상 디폴트선언을 하였다. 이가 위태롭다. 국가간 적극적 공조와 상호연대가 세계경제를 구할 것이다.

벼는 서로 어울어져 기대고 산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이성부의 시 에 나오는 구절이다. 무한경쟁의 극한으로 치달았던 사회의 방향키를 돌려 서로 의지하고 연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산재해 있는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고 내실 있는 사회로 가기 위한 튼튼한 발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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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과 공익성은 양립가능한가?

논술작문 2012. 4. 13. 13:00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은 공리주의를 주창하며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도덕과 입법의 기초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쾌락주의 철학의 연장선 상에서 공리주의는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최소단위의 자극은 쾌락 또는 고통이라고 한다. 고통 또한 음의 쾌락으로 보았을 때 전체 사회 구성원들이 최대한 쾌락을 누리는 상태를 바람직한 것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쾌락은 행복의 기본단위이며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을 최대한 증진시키는 것은 바로 공익을 달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리주의는 방송의 공익성을 판단하는 잣대로서 기능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시청률과 공익성은 상호 대립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공리주의의 원리에 따르면 이 두 개념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치되기도 한다. 프로그램이 재미있는 경우 대체로 시청률이 높다. 이러한 재미는 그 자체로 이미 공익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면 할수록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원칙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이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지, 혹은 교훈을 주는지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은 시청률과 공익 모두에 긍정적 이익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재미만 고려해서는 방송의 공익성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다. 이는 방송을 시청할 때 즉각적으로 얻게 되는 일차적 쾌락 뿐만 아니라 그 방송을 통해 얻은 유용한 정보나 지식, 교훈, 희망 등에서 파생되는 이차적 쾌락 또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그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또 다른 사회적 행복을 만들어 낸다면 이는 금상첨화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시청률과 공익성은 대립하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문제는 일차적으로는 쾌락을 주지만 이차적으로는 고통을 발생시키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폭력적인 콘텐츠는 일차적으로 그 방송을 시청할 때는 쾌락을 주지만 이차적으로는 모방행동을 통해 사회를 폭력적으로 만듦으로써 사회 전체의 잠재적 행복을 감소시키고 고통을 증가시킨다. 만약 일차적인 쾌락보다 이차적인 고통이 더 클 경우 방송은 공익성을 잃는다. 이 경우는 시청률과 공익성이 양립하지 못하며 상호 대립하게 된다.

방송 제작자는 시민의 공유자원을 빌려 사용하느니만큼 그에 대한 대가로서 공익성을 갖는 방송을 제작할 의무가 있다. 높은 시청률을 통한 영리추구는 그 반대편에 공익성이 항존하는 범주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공익성을 담보하지 않은 방송은 시민과의 계약 위반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청률과 공익성은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다만 콘텐츠의 내용과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 따라 높은 시청률이 공익성을 얻기도 하고, 오히려 공익을 해치기도 한다. 분명히 시청률과 공익성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 길은 어렵지만 가야 하는 길이며 그렇기에 방송제작자의 책임이 막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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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현상

논술작문 2012. 4. 13. 12:58

피에르 부르디외는 현실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지배적 문화에 적합한 언어나 상징적 표현, 생활양식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높을수록 문화자본을 많이 소유하게 된다. 문화자본의 소유는 정치, 경제적 권력의 분배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문화자본을 많이 소유하기 위한 경쟁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 경쟁에 가장 유리한 전략은 자기 문화를 지배적 문화로 만드는 것이다. 한류라는 말랑말랑한 겉모습의 이면에는 지배적 문화가 되기 위한 구조적 권력관계의 형성과 그 고착화 과정이 똬리를 틀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의 드라마가 중국에 수출되기 시작하면서 중화권을 중심으로 한류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한국의 문화상품은 중화권을 필두로 일본, 동남아 등지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근래에 들어서는 유럽, 남미 등에서도 호응을 얻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시작은 우리 문화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과도기적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모더니즘 단계에 있는 중국의 눈에 한국의 문화는 극단적 이질감을 피하는 동시에 세련돼 보인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의 일본 중년에게는 잘나가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한국 드라마에 대한 애착으로 나타난다. ‘과도기적 문화는 이처럼 문화적 역량보다는 문화 구조의 이점으로 교묘하게 아시아 사람들의 기호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한류열풍은 문화라는 소프트웨어적 개념과 이를 생산하고 상품화하는 하드웨어적 시스템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한국의 여러 연예 기획사는 문화상품의 기획부터 생산, 마케팅, 판매, 투자에 이르기까지 제조업과 비견될 정도의 체계적 효율성과 자본력을 갖췄다. 이를 통해 생산되는 문화상품은 그 질적 측면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가지며 대량생산, 유통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한류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한국의 문화상품은 아시아를 석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한국 사람들의 문화가 아닌 일부 기업의 문화상품 생산 시스템에 의한 것으로서 문화적이기보다는 구조적인 현상이다.

  질량이 큰 물체가 그만큼 세게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다는 인력의 법칙은 문화현상에도 적용된다. 규모가 크고 힘이 센 문화에 문화적 영향력이 작은 나라들은 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최근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미치고 있다. 아시아에서 세력을 키운 한국의 문화 상품이 더 큰 힘으로 외부의 수요자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이는 물리현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구조적 필연성을 지닌다. 한류는 단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탄탄한 구조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한류는 소프트웨어적이기보다는 하드웨어적이며 문화적이기보다는 구조적이다. 과연 한국 사람들은 문화인인가. 우리들이 정말로 수준 높은 문화를 생산하며 향유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머뭇거릴 수 밖에 없다. 한류의 실체는 한국 사람들 전반의 문화적 역량이 반영된 것이 아닌, 삼성이나 현대의 제조업처럼 소수의 기업이 기획하고 생산한 수출상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류열풍으로 한국의 이미지가 좋아지고 우리의 문화상품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것은 반길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정말 문화적인지에 대해선 스스로 물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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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은 공인인가?

논술작문 2012. 4. 13. 12:57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그의 모든 인생이 TV를 통해 대중들에게 방영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이 비도덕적이라고 해서 그를 비난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지 의문스럽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절망하는 장면에선 자연스레 주인공에 감정이입 하여 그의 고통을 공감하게 된다.

흔히 연예인으로 불리는 일군의 직업인들은 다양한 대중매체에 스스로를 노출시키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 노출은 필요 이상의 범주에까지 확대되기 쉽다. 직업적인 필요를 벗어나는 사생활이 미디어를 통해 폭로되고 그로 인해 해당 연예인이 심리적, 물질적 피해를 입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진다면, 이를 공인에 대한 알 권리로 포장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연예인을 공인으로 일괄규정하고 공적 책임이라는 굴레를 씌운다면 사회 전반의 표현의 자유 위축도 염려된다. 그러한 굴레 속에서 연예인은 스스로를 자기검열 할 것이고 그들의 표현 범주는 심하게 제약당할 것이다. 이는 연예산업 전반에 경쟁력 상실을 불러올 것이며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우려가 크다. 가장 자유분방해야 하는 직업인들마저 자기표현에 있어 조심조심 몸을 사리는 판국에 일반인들은 더욱 무기력하게 표현의 자유 침해를 용인하게 될 우려가 있다.

문제의 핵심은 연예인 개개인의 인격에 있지 않고 이를 방영하는 미디어의 태도에 있다. 아무리 대중이 연예인들에게 공인의 지위에 걸맞은 행실을 강요한다 해도 대중의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미디어가 자극적인 소재를 끊임없이 공급하기 위해 연예인의 행동을 자기 입맛에 맞게 갈무리해 방영하는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대중은 미디어에 비친 연예인의 이미지에 대해 평가할 뿐이지 정말 그 사람에 대해 명확히 알고 평가할 수 없다. 오히려 연예인의 도덕성 문제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미디어의 도덕성을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요즘 TV에서 방영되는 한 개그 프로그램에 애정남이라는 코너가 있다. 이 코너의 개그맨은 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키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을 소개한다. 도덕성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갖춰야 할 것이지 연예인에게 특히 강요할 문제가 아니다. 연예인들의 영향력에 걸맞은 책임도 누가 강요할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향유하는 속에서 자신의 양심에 맡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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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있는 음식의 역설

아이디어 2011. 11. 3. 23:46



 

우리는 보통 매우 맛있는 음식을 과장하여 말할 때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게 맛있는 XX'라고 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문장으로부터 도출되는 사실은 바로 '아무도 이러한 음식의 존재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결과에 다다르게 됩니다. 지금부터 이에 대한 저의 쓸데 없는 생각들을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게 맛있는 XX'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한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겠습니다.

*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 이 부분은 사건이 두 명의 사람을 가정하고 있으며 XX를 먹고 있는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사망의 가능성과 그에 대한 인식여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사람이 사망할 수도 있고 사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에 대한 경우의 수를 나누어 따져보겠습니다.

1.
아무도 죽지 않는 경우
아무도 죽지 않았으므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음식임을 인식할 길이 없다.
xx
를 맛있게 먹을 수는 있지만 그 것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음식의 진가를 알려줄만한 단서가 없다.

2. 둘 중 하나가 죽었을 경우
1)
죽지 않은 사람은 그 음식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음식이기 때문에 나머지 한명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그 음식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음식임도 알 수 없다.
2)
죽은 사람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인식할 수 없다.

3.
둘 다 죽었을 경우
둘 다 죽었기 때문에 둘 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을 인식할 수 없다.

4.
3의 관찰자 가정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었으며 나머지 한명이 그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모두 관찰하였더래도 제 3자는 직접 먹고 맛본 것이 아니므로 그것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게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
결국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게 맛있는 음식은 존재할 수는 있으나 아무도 인식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 됩니다. 마치 카산드라의 예언과 같은 운명을 타고 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있는 음식'. 어쩌면 우리는 오늘도 이러한 음식을 먹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요^^ 길거리에서 먹음직스런 귤을 팔고 있는 아저씨를 보고 문뜩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어때요? 그럴 듯하지 않나요? 혹시라도 오류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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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논술작문 2011. 10. 30. 22:17

아버지가 죽었다. 학교에서 축제가 한창이던 5 13 20 11, 그는 남아있는 마지막 숨을 힘겹게 몰아 쉬며 눈을 크게 뜨고, 그렇게 멈춰버렸다. 뭔가 다음 행동이 발생해야 할 것 같은데 필름의 컷처럼 정지된 그의 모습은 내 머리 속에는 뚜렷이 박제되어 버렸다. 삶과 죽음이 서로 등을 돌리는 틈을 타 나는 그의 이마에 마지막 키스를 하였다. 시퍼런 차가움이 느껴졌다. 하얀 천이 그를 덮었고 앙상한 발가락만이 흔들리는 침대 위로 덜컹거렸다. 나는 영안실로 향하는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죽음과 대치하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을 죽음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판문점의 남북 군인들처럼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두고 서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는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지만은 않았다. 죽음을 노려보는 눈빛을 나는 그가 잠자는 도중에 이따금씩 치켜 뜨는 눈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우리 남매가 의사의 ‘길어봐야 이틀’이라는 벽력 같은 선고를 듣고 그의 죽음을 예비하는 동안에도 그는 삶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야수처럼 드러내었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도 명료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눈을 번뜩였다. 총 맞아 죽어가는 광포한 사자처럼. 나는 그의 옆에서 며칠 동안을 지켰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그를 죽였다.

그를 죽인 것은 암이 아니었다. 바로 아들인 나 자신이었다. 그는 사실 그 순간 그렇게 죽지 않을 것이었다. 의사가 우리 가족에게 그만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명령 같은 그 말에 나는 종놈처럼 따랐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아버지는 1년 전에 간암 진단을 받으셨다. 초기에 발견하여 쉽게 고칠 수 있다던 병은 거듭되는 수술과 치료를 모두 물리치고 아버지의 몸을 장악하고 말았다. 그렇게 아버지는 죽음의 문턱까지 떠밀려 가서 그 문턱 앞에서 처절한 반항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그 전 과정을 지켜 보면서 나는 희망의 끈을 놓고 말았다.

만약 죽은 아버지를 부검했다면 그의 사인은 이렇게 나올 것이다. 부친의 죽음을 미리 예감하여 희망의 끈을 놓고 무기력하게 그의 죽음을 기다린 아들의 눈빛.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두려워하는 한 인간의 처절한 호소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단지 모든 것이 다 괜찮아 질 것이고 당신은 곧 일어나서 우리와 예전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고만 변명처럼 되풀이했다. 그러한 교과서적이고 무미건조한 대답은 그에게 어떠한 희망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어쩌면 나는 그 당시에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상하리만큼 나의 의식은 그의 죽음을 앞두고 명료해졌다. 지금 와서 고백하건데 나는 그 때 아버지를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다급한 감정의 울림보다 앞으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내가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하는가에 대한 차가운 걱정들이 앞섰다. 어렸을 때는 상상만 해도 왈칵 쏟아지던 눈물들이 어쩐 일인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앞에 두고, 또 다른 가족들 앞에서 내가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내 자신의 다짐도 있었지만 어른이 되면 눈물이 줄어든다는 일반적인 사실이 그토록 야속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차가운 모습으로 아버지 옆에 병풍처럼 위치해 있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인공 호흡기로 겨우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도 그의 눈은 나의 눈동자를 향했다. 나의 눈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듯 했다. 하지만 그가 내게서 찾아간 것은 ‘절망’이었다. 자신이 가장 믿던, 자신을 꼭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던 큰아들의 눈 속에서 그가 본 것은 절벽 끝에 매달린 절망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의사를 통해서 그의 죽음의 예언을 들었지만 아버지 당신은 아들의 눈빛으로부터 자신의 죽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 때 아마 그는 길었던 싸움을 끝낼 준비를 시작했던 것 같다.

그의 마지막은 기도의 아멘 소리와 함께 왔다. 목사의 마지막 기도가 끝나자 아버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필사적으로 잡고 있던 숨줄을 놓았다. 친족들과 교인들이 그를 빙 둘러싸고 있던 그 순간, 잠시간의 적막이 흐르고 내 눈에선 그제서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의 죽음은 이렇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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